홍상수 감독보다 배우들의 신경줄이 더 팽팽하게 날 서있는 듯했다. ‘오늘의 촬영대본’을 불과 1시간 전에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홍 감독은 A4용지 두장짜리 대본을 그보다 2시간 전 부근 분식집에서 쓰기 시작했다. 12월13일 26회차 촬영으로 50%의 진도를 넘어선 지금까지 대체로 그랬다. 경기도 부천 아남아파트 근처 호프집. 헌준(김태우)과 문호(유지태)가 7년 전의 연인인 선화(성현아)를 찾아와 기다리는 참이다. 헌준은 문호의 선배다. 헌준이 먼저 선화와 연애를 했고, 얼마 뒤 선화를 남겨두고 유학을 갔다. 그뒤에 문호가 선화와 연애를 했다. 두 사람과의 연애가 끝난 뒤 선화는 대학을 중도에 관둬버렸다. 현재 헌준은 예비 영화감독이고, 문호는 예비 대학교수다. 함께 낮술을 먹다 과거의 여자를 찾아온 이들은 각자 제멋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선화를 회상하고, 상상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다섯 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처음으로 회상신을 대거 찍고 있다. 어떤 변화일까? “이전에는 회상이나 상상의 장면을 안 찍었는데 그런 신들이 일상에서 상관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의 맘속에서 회상, 상상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걸 편하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일부러 그걸 쳐다보지 않았던 건 기존 드라마에서 너무 전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사실 한 자연인의 하루는 상상도 하고 과거를 기억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현재와 회상, 상상과 꿈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없어 보이게 하고 싶어요.”
영화는 철저하게 두 남자의 시선에서 전개될 모양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 속에서 온갖 종류의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여자들은 두 남자의 회상, 상상에서 비롯한다. 홍 감독은 배우들과 고개짓 하나, 억양의 미묘한 차이 하나하나까지 ‘합’을 맞춰나갔다. 2004년 5월 개봉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