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유리의 뇌
2001-05-29
시사실/ 유리의 뇌

Story

만삭의 임신부가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살아남아, 아기를 낳고 곧 죽는다. 아기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병원에서 잠든 채로 성장한다. 이 병원에 입원한 소년 유이치는 잠자는 소녀 유미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 매일 입을 맞춘다. 청년이 된 유이치(고하라 유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유미(고토 리사)의 존재를 기억해내고, 다시 병원을 드나든다. 17년 만에 기적처럼 깨어난 유미는 유이치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닷새뿐임을 알고 있다.

Review

잠자는 소녀를 사랑한 소년이 있다. 이들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5일의 사랑이 허락된다. 매혹적인 스토리.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영화화한 <유리의 뇌>는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기대할 만한 작품이었다. <여우령> <링> <링2>로 알려진 감독 나카다 히데오라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솜씨만큼은 미더웠으니까.

저주와 음모의 플롯, 공포심리의 연출에 특장을 발휘해온 나카다 히데오는 그러나 맑고 착한 순애보, 애틋함의 정서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작들과의 연결고리가 될 ‘판타지’의 요소마저 살려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플롯도 영상도 신비로울 게 없다. 유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잠자야 했고 또 닷새의 말미는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현대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거나 운명의 신이 존재한다는 대사로 서둘러 입막음한다. 대신 희뿌연 병실이나 긴 복도를 반복해 비추는데, ‘판타스틱’ 분위기는 좀처럼 조성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설명이나 심리묘사도 빈약하다. 유이치가 매일 유미를 찾아가 키스하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지만, 아이다운 호기심이 운명적인 사랑으로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감정의 추이가 보이지 않는다. “일어나요, 공주, 왕자가 왔어요”라고 말하던 꼬마 유이치는 어엿한 청년이 돼 “어쩌다 그 애를 잊게 됐는지” 한탄하며 다시 유미를 찾지만 아무래도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멜로의 주인공에, 그들의 사랑에 감정이입할 수 없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유리의 뇌>는 몇편의 소설과 영화를 차용하고 있다. 짐작하듯이 모티브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빌려온 것이고 유미와 유이치, 담당의사의 삼각관계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곡>과 닮아 있다. 유미에게 ‘유리보다 투명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유이치와의 데이트는 <로마의 휴일>에서 따왔다. 음악은 <링2>에서도 함께 작업한 바 있는 가와이 겐지가 맡았다.

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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