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베를린] 본능만 남은 세상의 참극
2004-01-05
글 : 진화영 (베를린 통신원)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늑대의 시간> 정월 초하루 개봉

<퍼니게임> <피아니스트> 등 인간의 잔혹성을 들춰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사진)이 2004년 첫날부터 관객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문명사회의 붕괴를 암시하는 신작 <늑대의 시간>이 하필 정월 초하루에 개봉된 것이다. 낯선 환경에 던져져 야수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오디세이. 자연광으로만 촬영해 컴컴한 화면이지만, 느낌만으로도 상영 2시간이 내내 칠흑 같은 밤처럼 다가온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급작스런 재난으로 집을 빼앗긴 가족이 암흑 속을 헤매고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해 인간문명 자체가 암흑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결론은 ‘인간=야수’. 하네케 감독에게 “참을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스러운”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유가 재확인된다.

초반부터 가장은 총으로 살해된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리얼리즘보다 더 끔찍한 효과를 노렸다. 감정이 급격히 변화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공포에 질린 얼굴과 충격으로 인한 구토. 그녀를 통해 상상하는 참상은 리얼한 살해장면보다 더욱 잔인하다. 살인범에 의해 쫓겨난 안네와 아이들은 도움을 찾아 헤매지만, 마주치는 이들은 까닭 모르게 모두 냉정하다. 결국 찾아든 외딴 역사.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인간들의 마지막 둥지다. 이들이 대체 무엇을 피해왔는지 불친절한 감독은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생존을 위해 짐승이 되어버린, 본능만이 지배하는 인간들을 보여줄 뿐이다. 먹고 마실 것을 얻고자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아내(베아트리체 달)를 바라보는 남편(파트리스 셰로)의 지극히 평화로운 표정과 그런 남편을 향하는 부인의 증오 가득한 시선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처절함에 진저리치게 만든다. 굶주린 이들이 살아 있는 말의 목을 치는 장면은 신조차 눈을 돌릴 만큼 처참하다.

그러나 <늑대의 시간>은 하네케 감독의 다른 작품과 달리 희생을 통한 구원을 언급하기도 한다. 안네의 아들 벤(루카스 비스콩)이 길고 긴 죽음의 터널을 가까스로 통과한 뒤, 제 한몸 바쳐 세상을 구원하고자 불더미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벤의 희생은 보초에 의해 저지되니, 인간다운 터치가 그나마 묻어나는 유일한 장면이다. 하네케 감독은 이 장면을 믿고 새해 첫날 개봉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그의 잔혹한 세계에서는 실낱같은 희망도 굵은 동아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