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촬영현장]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01-06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유지태 +20kg 빵빵한 ‘돼지’ 로

“슛 갈까요 가겠습니다. 슈웃!” 4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도원초등학교 운동장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홍상수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지태가 홍 감독의 말투를 흉내내며 스탭들과 웃는다. 햇빛이 화사한 이날은 춥지 않았지만, 운동장에 인조 눈을 깔아놓은 탓에 겨울 냄새가 물씬 풍겼다. 홍상수의 5번째 영화 <여자는…>은 이날까지 합해 6회차 촬영만 남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유지태 20㎏ 찌우기, 김태우 8㎏ 찌웠다가 14㎏ 빼기

현장에서 만난 유지태는 몸집이 불어서 뒤뚱 뒤뚱하며 팔자걸음을 걷고 있었다. <올드 보이>에서 날씬한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나자마자 이번 영화를 위해 20㎏을 늘렸기 때문이다. 얼굴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섹스신에서 드러나는 배가 장난이 아니라고 옆에서 전했다. 홍상수 감독은 <생활의 발견> 때 김상경에게 그랬듯, 이번에도 몸매 좋은 남자를 ‘돼지’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거인 같은 느낌을 주려고. 나이도 실제보다 더 들어보여야 하고.” 홍 감독은 반대로 “김태우는 결이 세세한 느낌을 주기 위해 살을 빼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김태우는 회상장면에서 나오는 과거의 모습에선 살이 쪄있어야 하기 때문에 촬영 전에 8㎏을 늘렸다. 그리곤 마른 현재의 모습을 찍을 때 14㎏을 뺐다. “촬영 시작 전에 저녁 때만 되면 홍 감독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태우야, 자기 전에 라면 두개! 계란 두개 넣어서!’ 밤 10시에 하나 끌여먹고, 새벽 1시에 하나 더 끌여먹고 잤다. 찌우는 게 빼는 것보다 더 힘들다. 뺄 땐 운동하니까 기분은 좋아지는데, 찌울 땐 속이 더부룩하고 몸도 무겁고. 회상 장면 다 찍고 이제 빼야 할 때 부산영화제에 갔다. 공항에서 햄버거 사먹으니까 바로 홍 감독이 ‘태우야, 햄버거 같은 거 먹으면 안 되잖아’ 하더라.”

홍상수의 스타일

홍 감독은 대본을 촬영 전날 밤에 써서 아침에 배우들에게 준다. 또 대사나 동선, 조그만 몸 동작까지 자기 구상대로 하게 한다. 다른 감독들과 영화를 찍어온 전문 배우들에겐 이 스타일이 낯설 수 있다. “처음엔 힘들었다. 대사가 입에 안 붙는데, 내 식으로 바꿔 말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런 방식의 장점이 상투적인 걸 피하게 되더라.” 유지태는 연기보다도 자신이 연기한 인물의 치졸하고 야비한 면을 드러내는 대사들이 자기 생각과 맞질 않아 힘들었다고 전했다. “홍 감독 영화에서 사람이 사람 대하는 방식이 냉소적이지 않은가. 막상 연기해보니까 그런 면이 더 세게 다가왔다. 그게 내 안에서 충돌하는 거였다.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촬영장에서 자신은 야당이었고, 김태우는 여당이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여당’이었다는 김태우의 말. “대본은 당일 아침에 받지만 촬영 전에 감독과 말을 워낙 많이 해서 구체적 대사만 모를 뿐 상황은 다 아는 상태다. 또 감독이 내 말투를 잘 알기 때문에 대사에 그게 반영돼 있어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은 대학 선후배인 두 남자가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서, 둘이 시차를 두고 연애했던 한 여자를 함께 찾아가는 이야기다. 술마시다가 우연히 그 여자 이야기가 나오고, 즉흥적으로 부천으로 찾아가고, 부천에서 하룻밤 자고(그날 밤 둘 중 하나가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다음 날 오후로 영화는 끝난다. 설정부터 전형적인 홍상수 표이다. 두 남자는 속으로 경쟁심을 불태울 것이고, 각자의 머리 속에 그 여자와의 그럴 듯한 스토리를 그려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관계를 평면적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홍 감독이 이번에 동원하는 장치는 회상·꿈·상상 등 ‘사고로 재현되는 세계’이다. 이 장치가 어떤 울림을 줄지, 영화를 보기 전에 예측하긴 힘들다. 지금까지 촬영분의 가편집본을 본 김태우는 이 영화가 <오! 수정>이나 <생활의 발견>보다 훨씬 더 웃기며, 이야기도 쉽게 전개된다고 전했다. 루이 아라공의 싯구에서 따온 제목에 대한 홍 감독의 코멘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라는 말이 입에는 잘 붙는데 구속감이 없다. 어떤 메세지 같은 걸로 구속하지 않는다. 뻥 뚤린 듯한 그 느낌이 좋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