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백년 전도, 지금도 세상은 온갖 핑계로 고향을 떠나는 청년들로 어수선하다. 스물여섯살 여름의 나도 무거운 가방에 기대어 먼 나라의 공항에 앉아 있었다. 열 시간이 넘게 날았지만 1년간 머무르기로 한 학교까지는 또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이른바 공부를 하러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명분을 못 믿는 사람은 나였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승무원들은 공항에서 혼자 우는 애 따위는 비행기 이착륙만큼이나 흔한 구경거리라는 듯 직업적 미소를 흘리며 바삐 스쳐갔다. 나는 스스로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것인지 몰라 겁에 질렸다.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에 대책없이 서 있는 미아처럼.
그러나 젊음은 오만하고 영악한 것이어서 날아갈 듯한 희열 속에서도 그 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려 슬퍼하고, 가장 아득한 불안 속에서도 그것을 훗날 그리워하리라고 예감한다. 스페인에 모여든 유럽 7개국 학생들의 공동생활을 그린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주인공이 유학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장면은, 그 달콤하고도 위협적인 감각을 일깨운다. 젊은 날 한번쯤 허공에 폭죽을 쏘듯 자기를 객지에 던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모순된 감정을. 생면부지의 도시에 떨어져 길조차 찾지 못하는 주제에 주인공 자비에는 해설자의 입장이 되어 건방을 떨지 않던가. “천 번쯤 이 길을 건너면 이 거리도 피카딜리나 매사추세츠처럼 친근한 지명이 되겠지. 제일 비극적인 재난도 돌아가면 근사한 무용담이 될 거야.”
하긴 워낙 이치가 그렇다. 영화와 소설로 우리에게 알려진 성장 이야기들이란 따지고 보면 일정한 반추를 거쳐 기승전결의 꼴로 성형된 후일담들이다. 많은 경우 성장담의 화자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처럼 <스탠 바이 미>의 고디처럼 장래의 작가요 타고난 ‘관찰자’들이다. “삶에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살아야 할 때와 증언해야 할 때다”라는 카뮈의 표현에 준하자면 성장담의 작가들은 두개의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종족에 해당된다. 현기증의 와중에도 훗날 살아남아 이 혼돈을 묘사할 때 쓸 문구를 고심하는 고약한 습벽을 지닌.
유럽이 하나가 되려는 시대 포착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도 그와 같은 ‘자서전 작가’의 나르시시즘을 감추지 않는다. 예닐곱명의 룸메이트가 벌이는 치사한 냉장고 자리싸움부터 1년을 궁금해 하는 어머니에게 던지는 무뚝뚝한 대답까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에피소드에는 감독의 일기장 갈피에서 뒤져냈을 법한 사적인 기억의 뭉클한 냄새가 난다. 클레어 드니, 브누아 자코와 같은 세대로 묶이는 프랑스 감독 클라피쉬는 (짐작대로) 자신의 뉴욕 유학 경험과 누이동생의 바르셀로나 유학 생활을 자료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생의 느낌을 채집하려는 클라피쉬의 집착은 연원이 꽤 깊은 듯하다. 구경이라면 뭐든 좋아했고 12살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그는 17살 바캉스 때 카메라를 집에 두고 갔는데 내내 사지 중 하나가 절단된 듯한 불구의 느낌에 시달렸다고 회고한다. 출세작인 <고양이를 찾아서> 촬영 당시에도 클라피쉬는 촬영현장 주변 사람들의 일화와 파리에서 진행 중이던 재개발 철거 사업을 영화 속에 그대로 흡수했다. 각국 배우를 개방적인 오디션으로 뽑고, 인물과 사건의 비율이 불균형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역시, 흔히 비교되는 시트콤 <프렌즈>보다는 MTV의 유사 다큐멘터리 <리얼 월드>에 가까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면이 있다. 현실에 가능한 한 밀착한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강렬한 집착은 뒤집어보면 정반대의 모순된 욕망, 맨눈이 아닌 렌즈를 사이에 두고 현실을 파악함으로써 일정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덤으로 선택과 조작의 권력을 가지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목격자보다 컬렉터에 가까운 감독의 면모를 명확히 드러낸다. 깐깐한 컬렉터의 작업은 수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디스플레이로 완성되는 법.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계몽하는 듯한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이 지점에서 갑자기 파리의 아늑한 지붕 밑을 노래한 영화 <아멜리에>와 흡사해진다. 시퀀스의 흐름과 촬영 속도는 주인공의 맥박 빠르기에 맞춰 변덕을 부리고, 그래픽과 다중노출이 예고없이 출몰하는가 하면 백일몽에 이르러서는 르네상스 사람 에라스무스가 길거리에서 눈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클라피쉬 감독이 기념하려는 대상은 어느 젊은이의 의미심장한 스물다섯살만이 아니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유럽이라는 공간과 유럽이 하나가 되려고 꿈틀거리는 시대 자체에 열광한다. 아니, 시대와 공간과 자아의 구분은 클라피쉬 감독에게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1년간의 바르셀로나 체류를 마치고 귀향한 자비에는 애인과 어머니의 품에서가 아니라 낯선 관광객들의 거리 몽마르트르에서 자기를 찾는다. 또한 자신을 찍은 무수한 사진은 하나도 진정한 자기 모습이 아니라고, 여행에서 마주친 무수한 ‘그’와 ‘그녀’들 모두가 바로 나라고 뇌까린다.
그리하여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이 결론짓는 ‘유럽(인)’의 실체는 ‘엉망’이고 ‘뒤범벅’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이 신념은 카탈루냐어로 수업하는 교수에게 불평하는 동료에게 “세계화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거야”라고 해명하는 감비아계 스페인 학생의 말에서 명백해지고, 카메오로 출연한 감독 자신이 내뱉는 “엉망진창이야”라는 넋두리를 통해 영화의 표어가 된다. 그러고 보면 작은 ‘윈도’로 화면을 분할해 스크린을 멀티태스킹 모드로 운영하고, 운동의 속도를 조작하고 ‘현재 위치’를 가리키는 화살표 기호를 화면에 그려넣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과잉한 기법 역시 어쩌면 세상을 요약할 수 없는 거대하고 불균질한 덩어리로 바라보는 영화가 택할 수밖에 없는 화법인지도 모른다.
사실 영국, 독일,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7개 국적의 학생들이 룸메이트로 사는 바르셀로나의 아파트는 유럽연합에 대한 지나치게 손쉬운 메타포다. 특히 영국 여학생의 철없는 동생 윌리엄이 등장해 단순한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코미디를 주도하는 후반부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를 민족성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이 궁극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아파트는, 무식한 윌리엄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유럽 각국 스테레오타입의 놀이터다. 틈틈이 홍차를 권하는 영국 여학생 웬디는 아파트의 규율을 잡으려고 애쓰고 결국 우스꽝스러운 미국인과 사귄다. 독일인 토비아스는 룸메이트 면접에서 심리분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방 정리에 열심이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A. O. 스콧은 덴마크, 이탈리아 학생이 어쩐지 주변인으로 밀려나고, 입주하자마자 중심인물 노릇을 하는 프랑스인 자비에가 벨기에인 이사벨과 남매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사실까지 유럽의 각국 관계에 빗대어 보기도 했다. 대륙 유럽의 멤버가 아닌 영국과 미국 캐릭터의 전형화, 희화화 정도가 상대적으로 큰 것도 프랑스 출신 감독의 시야를 넘어서지 않는다.
스테레오타입에서 서슴없이 웃음을 끌어내는 클라피쉬 감독은 내심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면 그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가 경계하는 것은 윌리엄으로 상징되는 편견과 제노포비아(이민족 혐오증)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인종주의자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공정해지는 일도 모두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는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의 결론은 결국 “여행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쯤의 분방하고 순박한 슬로건이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가 “유럽 젊은이여, 가슴을 펴라”라는 제목의 캠페인 영화로 보인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공무원이 된 자비에가 사무실을 탈출해 별안간 작가가 되겠다고 영웅적으로 외치는 에필로그는 성장영화의 피날레에 대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구식의 사족처럼 보인다. 굳이 예술가가 되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새로운 이상적 유럽의 축소판과 같은 스페인의 아파트에서 성장한 청년이 국경없는 유럽의 경제 교류를 돌보는 공무원으로 살아간다는 결론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가 묘사한 체험에 대한 배신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었을까.
삶을 사는 동시에 스토리로 만들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적어도 유럽의 범위 안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nation)를 구닥다리 사고방식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통합할 새로운 정체성을 고민하는 일도 헛수고라고 말한다. 대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가 충성을 맹세하는 새로운 ‘nation’은 세대의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이른바 모바일한 시대, 여행이 일상적이고 시간과 공간, 이미지를 조작하는 테크놀로지를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가 흥겹게 만드는 힘은 “우리는 움직인다. 만난다. 받아들인다”라고 자랑하고 느슨한 연대를 자축하는 복 많은 젊은이들의 자기도취다. 그들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예찬한다. 그러고 보면 현란하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스타일은 개인 홈페이지의 그것과 닮았다. 디지털카메라를 비롯한 갖가지 도구로 내가 본 풍경, 마주친 타인, 감상한 영화와 음악, 맛본 음식을 포착해 하나의 내러티브를 만들고 셀프 이미지를 장식하고 자기 정체성의 외연을 확장하는 홈페이지의 주인들에게, 세상은 모니터 위에 취향대로 스크랩할 수 있는 쇼윈도이고 나는 얼마든지 풍부해질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은 삶을 사는 동시에 스토리로 만든다. 누구나 자서전 혹은 픽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성장영화는 어느 때보다 자극적인 도전과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