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드라마를 통과하는 인물들에게서 입체적인 유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내극의 좁다란 방 안에서도 납득할 만한 변화무쌍함을 가진 인물은 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 드라마가 인물에게 등반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단조롭다 못해, 편협하리만큼 집요하고 일관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들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헤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조여오는 자기모순에 내던져졌으면서도 같은 바람을 반복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물들에게 산행(山行)은 강제적인 깊이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인물은 거의 운명이 되다시피한 스스로의 갈등만큼이나 잔혹한 시련과 자기 징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산은 인물들이 씨름하는 운명 그 자체의 은유가 되곤 한다.
<빙우> 속 인물들도 그리고 그들의 갈등도, 따라서 매우 단순한 편이다. 경민(김하늘)은 대학 산악부 선배이자 유부남인 중현(이성재)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어린 시절 경민의 소꿉친구였던 우성(송승헌)은 번지수가 틀린 사랑을 경민에게 기대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경민이, 죽을 것 같이 보고 싶은 중현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고, 그녀가 죽고 나면 이제 그녀를 잊지 못하는 두 남자가 함께 산을 오르고 조난당해 서로의 기억이 한 여자로 겹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참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죽음, 고전적인 삼각관계가 산으로 이들을 이끄는 갈등의 모든 것이다. 세 사람 외의 등장인물들에게 좀처럼 시선을 주지 않는 영화의 이야기 얼개는,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그들의 태도만큼이나 평면적이고 단조롭다. 디테일마저 과감하게 생략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알래스카 설산의 스펙터클로 치닫는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아시아크(Asiaq)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이승에서 헤어진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산이다. 산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데에는 그런 종류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산 저편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혹한이나 악천후, 험난한 지형이 아닌, 신과의 씨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산은 중현, 경민, 우성 이 세 사람에게는,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구원이다. 이 영화가 산을 올라가야 하는 동기는 이렇게 드라마적 필연 위에 있다. 산의 스펙터클에만 주목할 한국형 산악블록버스터의 유혹을 피한, 대한민국 최초의 산악영화 <빙우>의 출발은 크게 보아 일단 옳게 꿰어진다. 삼각관계라는 뻔한 설정과 단조로운 인물들에게 생령을 불어넣으려는 구원의 방식으로. 하여 <빙우>가 한국 최초 산악영화로서 맞이하는 도전은 소재 자체에서 오는 기술적인 난점이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와 인물에 서사의 깊이를 가불해주는 산악드라마의 미덕을 살려내느냐 아니냐에 있다. 따라서, 제작진 모두가 알고 있었겠지만 <빙우>는 ‘아시아크’에 ‘올-인’한 영화다.
경민은 대학 산악부 선배인 중현을 사랑하지만, 부인이 있는 중현과 경민의 사랑은 늘 위태롭다. 한편 소꿉친구였던 우성은 경민을 바라보지만, 이미 경민은 중현을 사랑하고 있으니 이는 가망없는 짝사랑일 뿐이다.
그러나 ‘산악멜로’를 자처하는 <빙우>는 산행의 디테일을 통해 감정선을 잡아나가기보다는 단조로운 이들의 삼각 연애담에 미스터리 기법을 도입하는 편을 택한다. ‘산악’보다 ‘멜로’에 방점이 찍힌 셈인데, 카메라는 중현과 우성이 조난당한 현재의 이야기와 산 밑에서의 일들 사이를 잦은 플래시백으로 오간다. 이것은 심플한 이야기에 밑줄을 칠 수 있는 감각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등반대의 여정은 플래시백들에 호흡이 잘려 순식간에 능선과 정상, 하산 사이를 느닷없이 비약해버린다.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두 남자가 실은 한 여자로 얽혔다 같은)이나 혹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실들을 천천히 드러내려고 뜸을 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결과적으로 산 밑의 사건이 산 위 사건을 흡수해버리고 산악드라마는 실종된다. 거대한 풍광신과 세트촬영분이 좀처럼 하나로 붙질 못하고 세 배우들의 화학반응이 무디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는 대신 가능한 짧은 호흡으로 나뉜 산 밑 삼각연애담에 작은 장치들을 준비해놓고 비교적 무난한 멜로물로 향한다. 초반의 낯간지러운 장면들을 제외하고 최초 산악영화라는 기대치를 버리고 나면 라스트신의 슬픔이 그렇게 느닷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뒤로 광막한 스펙터클이 호화로운 병풍처럼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MBC드라마 <산>이나 포지션의 <I love you> 뮤직비디오에서 보았던 것처럼 주인공들의 사랑에 산이 들러리 서는 태도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 위에서 인간이 로프와 자일로 산과 대결하는 드라마를 통해 역으로 주인공들의 내면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던 <빙우>의 초기 설정과는 꽤 다른 것이다. 이 귀결은, 쉽지 않았을 산악로케이션의 촬영 강도와 산악영화로서의 첫삽으로서의 <빙우>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아쉬움이 남는다.
‘아시아크’는 어디?
어디에도 없는 산
산악영화와 이종교배되는 서브 장르는 실로 다양하다. 능선을 따라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며 정상에 오르는 여정 속에 이미 내장된 산악드라마의 타고난 서사성 탓이다. 더구나 무한한 여백으로 개활된 곳이면서도 인물들에게는 심리적으로 협소한 공간이라는 이중성도 한몫하는 측면이 있어서 액션과 혼융된 산악영화는 <클리프 행어>에서처럼 폐쇄된 고립공간에서의 액션과 광활한 스펙터클을 함께 보여주는 장르적 장점을 가진다. 드라마적 얼개가 촘촘하게 갖춰져 있지 않더라도 산이라는 심리적 공간이 서사적 탄력을 담보해주는 점이 액션이 산악영화와 친밀도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기 되기 위해서 산에 다시 정서적인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한 법인데 연인을 잃은 곳이라거나 가족을 잃은 곳(<버티칼 리미트>) 등의 장치를 놓는 것은 흔한 편이다. <빙우>에서 세 주인공을 운명처럼 연결하는 ‘아시아크’(Asiaq)의 설정은 무척 중요했는데, 알프스나 매킨리 같은 관광지 이미지, 안나푸르나나 K2처럼 기존 이미지들을 피하기 위해 아예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시아크’라는 이름을 지어낸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세 사람이 만남과 헤어짐을 넘어 이끌리는 산에 ‘이상향’의 이미지가 들어가기 원했던 제작진은 적합한 산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알래스카에 있는 산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에스키모어에서 적합한 단어를 뒤졌다. 그리고 그중에서 기후를 관장하고 악천후에서 인간을 돕는 여신의 이름이자 알래스카산(産) 블루베리의 이름이기도 한 아시아크를 찾아낸다.
기후와의 상관성 탓에 각종 기상연구소와 지구온난화 문제와 같은 기상대책포럼이나 회의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 이 이름은, 천변만화하는 산 위의 기상을 감안하면 산의 이름으로서는 완벽할 수 있지만 세 사람이 불가능한 사랑의 실마리로 넘겨다보게 하기엔 부족했던 것이 사실. 따라서 이승에서 헤어진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길잡이의 여신으로 아시아크를 둔갑(?)시켜야 했다. 이렇게 사연과 이름을 갖고 태어난 아시아크의 ‘몸’은 캐나다 유콘주의 화이트 패스와 르웰린 빙하지대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