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평균을 밑도는 상투적 신데렐라 서사, <내 사랑 싸가지>
2004-01-15
글 : 정승훈 (영화평론가)
무늬만 고3인 여고생과 명품으로 치장한 명문대 ‘킹카’가 인터넷 소설의 감수성을 벤치마킹하며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뒤쫓는다. 그러나 <동갑내기…>의 쿨한 싸가지도, 당당한 깡다구도, 여기엔 없다

연하 ‘남친’에게 차인 고3 하영(하지원)은 꿀꿀한 기분에 길 위의 콜라캔을 차버린다. 캔이 귀족 대학생 형준(김재원)이 몰던 외제차를 가격하리라곤 물론 예상 못한 일. 싸가지 없는 형준은 차 수리비로 300만원어치의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전대미문의 노비계약이 체결된다. 그 이후는 ‘싸가지’가 ‘내 사랑’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황당무계한 설정은 원작의 것이 아니다. 인터넷 소설 영화화 1호인 <내 사랑 싸가지>는 여고생과 대학생의 로맨스라는 뼈대 외엔 원작에서 빌린 살이 많지 않다. 사실 인터넷 하이틴로맨스의 참맛은 할리퀸 문고풍 소녀취향과 결별한 요즘 여고생들의 입담에 있다. 남자애들 비속어를 한아름의 이모티콘으로 귀엽게 버무리는 탈문법적 구어체는 순수문학의 작가적 ‘문체’에 아랑곳않는 넷세대의 ‘말맛’이다. 한데 바로 이 말맛이야말로 참으로 비영화적인 법. 그래서 영화는 대사를 가지치고, 한정된 시간 내의 드라마와 장르문법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남녀의 계급차를 부각한 <내 사랑 싸가지>도 원작보단 영화적 선배격인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더 기댄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나쁜 아류의 꼴이 돼버렸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백설공주의 꿈(오프닝)이 ‘백마=외제차’를 모는 현실(엔딩)로 실현되는 신데렐라 서사는, 노비문서라는 시대착오적 나침반을 길잡이 삼을 때부터 지나치게 ‘구린’ 방향으로만 치닫는다. 수리비가 거짓임을 알게 된 하영의 분노는 느끼한 싸가지의 ‘살인미소’와 철지난 ‘보랏빛 향기’에 저항없이 사라진다. 주인님을 향한 노비의 일편단심은 끝내 ‘텅 빈 머리’로 ‘명문대 합격’의 기적을 일구고야 만다. 현실감을 견지한 <동갑내기…>의 쿨한 싸가지도, 당당한 깡다구도, 여기엔 없다. 껄렁한 척 폼 잡지만 불온한 대신 불편하기만 한 왕자병 남성판타지와 거기 맥없이 투항하는 공주선호병 여성판타지가 결혼식을 치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 판타지마저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평균적 기대지평을 밑돈다는 점이다. 한물간 화장실유머와 썰렁한 배우들의 개인기는 ‘웃어라!’고 명령할 뿐 설득할 줄 모른다. 막무가내 화법은 감정이입의 여지를 안 주는 멜로 코드에서도 지속된다. 갑자기 조명이 들어온 강변에서 빙빙 돌며 찍은 키스신은 상투성의 극치를 달린다. 이런 식의 짝짓기는 이 영화의 감독보다 동명의 개그맨이 더 감동적으로 진행했던 것만 같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