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리고 개봉을 앞둔 <페이첵>까지. 네 영화는 에스에프 소설의 거장 필립 K. 딕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네 작품은 모두 지워지거나 이식되는 기억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차이도 있다. 뒤에 나온 작품일수록 원작자의 주제의식이 점점 옅어지고 할리우드식 선악구도와 액션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 존 우(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페이첵>은 네 작품 가운데 필립 K. 딕의 냄새가 가장 덜 나는 영화다.
오토바이 추격·격투 볼거리, 원작·감독 개성 실종 아쉬움천재 엔지니어 마이클 제닝스(벤 에플렉)는 첨단기술제품을 분해해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시키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분해공학자다. 마이클이 개발하는 새 기능은 기업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작업중의 모든 기억을 인위적으로 제거당한다. 알콤이라는 거대기업을 운영하는 옛친구 지미는 마이클에게 큰 거래를 제안한다. 3주나 3달도 아닌 3년의 시간을 저당잡혀야 한다는 부담으로 지미는 잠시 망설이지만 9천만 달러의 주식이라는 엄청난 페이첵(보수)에 넘어가고 만다.
영화는 마이클의 머릿속이 그렇듯 그가 실험실에 들어갈 때와 3년 뒤 나올 때를 막바로 이어붙이며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봉합한다. 문제는 보수를 찾기 위해 마이클이 은행에 도착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돈다발 대신 자신이 직접 사인한 주식 포기각서와 허접한 물건 꾸러미가 들어 있는 봉투 하나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마이클은 총을 든 사내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포스터 바탕에 그려져 있는 퍼즐 모양처럼 <페이첵>은 19개의 너절한 물건들이 하나하나의 퍼즐조각이 되어 말소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을 그린다. 총이나 첨단기기가 아니라 구겨진 담배갑, 종이 성냥, 클립 같은 일생에 도움 안 돼 보이는 물건들이 적재적소에서 마이클의 생명을 구한다. 아니 마이클의 천재성이 이 사소한 물건들을 총보다 유용한 연장으로 활용한다. 십여년 전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했던 안방극장의 주인공 맥가이버를 떠올리게 한다.
퍼즐 맞추는 재미에 더해 <페이첵>은 오토바이 추격 장면과 나무봉을 이용한 격투 등 격렬한 액션 볼거리를 제공한다. 두시간 동안 즐길 만한 영화로 이 모든 장면과 줄거리는 서투르지 않고 매끄럽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다. 지워진 원작의 체취는 물론 존 우 감독의 어떤 개성도 배어나오지 않는다는 게 두 인물의 팬들에게 아쉬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물론 존 우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서로의 얼굴에 총을 겨누는 두 인물이라든가,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삽입했지만 억지로 찍은 낙관같은 느낌이다. 쫓기고 피하는 데 바빠서 그런지 벤 에플렉에게는 인간적인 면모가 그닥 묻어나오지 않는 반면 우마 서먼이 연기한 마이클의 애인 레이첼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람냄새가 나는 인물이다. <킬빌>에서 우마 서먼의 액션을 본 관객이라면 마이클과 함께 싸우는 레이첼의 파워가 시시하게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2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