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그 일이 공중으로 펄쩍펄쩍 점프 중이던 열두살 사내아이에게 닥쳤다면 사태는 상당히 위험해질 수도 있다. 교훈의 주인공은 바로 영화 <피터팬>의 스타 제레미 섬터. 그의 ‘웬디’ 레이첼 허드-우드가 처음 세트에 오던 날 섬터는 트램펄린 위에서 도약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저 소녀에게 기필코 깊은 인상을 남기리라 0.1초 만에 작심한 어린 로미오는 높이 더 높이 뛰어오르다 매트 바깥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자못 영웅적인 행동으로 레이첼 허드-우드의 첫 번째 팬이 된 제레미 섬터는 바야흐로 무수한 라이벌을 물리쳐야 할 판국이다. 얼마 전 공개된 영화 <피터팬>에서, 스크린 안팎을 통틀어 웬디의 매력에 무심할 수 있는 강철심장은 샘 많은 팅커벨 정도가 고작일 터이기 때문이다. 신동의 연기라는 호들갑은 아니다. 아마도 스크린에 생동하는 힘의 정체는, 짜릿하고 거대한 경험을 함께하는 사춘기 소년소녀 사이에 흐를 법한 연분홍빛 감정과 긴장일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이 소녀를 편애한다는 사실은 해적의 문신만큼이나 뚜렷하다. 그녀는 젊은 날 캐서린 헵번의 당돌한 코와 청명한 눈을 가졌다. 화가 르누아르가 그린 소녀들의 뺨과 줄리아 로버츠의 미소를 지녔다. 앞으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많아 보인다. 이 소녀는 언젠가 은막에서 엘리자베스 여왕도 테스도 될 수도 있으리라. 단,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고 구한다면.
<피터팬>의 웬디는 이야기꾼이다. 그것도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약탈한 해적을 무찌르는 베드 타임 스토리를 지어내는 독창적인 작가다. 그러나 레이첼 허드-우드는 아직 자기의 손으로 이야기를 쓴 적이 없다. 7살 때 아동극에 출연한 경력이 고작인 소녀를 <피터팬> 오디션에 응모하도록 떠민 것은 조부모. 열세살가량의 ‘잉글랜드의 장미’를 찾는다는 광고를 우연히 본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니, 그렇다면 딱 우리 레이첼 아닌가?”라고 외치며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평균적인 틴에이저답게 디즈니판 애니메이션 <피터팬>에 열광했고 J. M. 배리의 원작은 몇몇 단어가 너무 길어 싫증을 내던 10대 소녀 레이첼이 잉글랜드 서리 지방의 조용한 집을 떠나 그녀에게는 ‘네버랜드’나 진배없는 호주까지 날아가게 된 사연은 그러했다.
세계의 도시를 돌며 플래시 세례를 받고 난 지금도 레이첼 허드-우드가 꿈꾸는 것은 은막이 아니라 바다다. 네버랜드도 할리우드도 해양 생물학자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네버랜드를 떠났다고 웬디가 모험을 저버렸던가? 웬디는 천천히 늙어가며 때로는 더럽혀지는, 영광이라고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용감한, 삶이라는 모험을 택했다. “무시하던 급우들이 갑자기 친한 척하는 일” 외에 변한 게 없다고 말하지만, 소녀는 부끄러움도 일의 일부인 것을 알았다. 하늘을 나는 건 근사하지만 날기 위해서는 와이어에 멍들고 피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레이첼 허드-우드의 열네살은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삼부작으로 쓸 만한” 생을 꿈꾸는 소녀는 이제 막 프롤로그를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