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의 팬 사이트( www.philipkdickfans.com)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리얼리티는 ‘단지’ 관점일 뿐이다.” 이보다 더 그의 소설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어버릴 것이며, 언제나 피해자인 내가 찾아낸 범인은 나 자신이다(<토탈 리콜>). 혹은 구조 안의 블랙홀 속에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만큼 나쁜 결과는 필연적이 되어간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결국 세상은 환상의 시나리오이며, 그 안에서 주어진 나의 배역이 밝혀진 마지막 순간은 이미 때늦은 존재론적 대답이다(<블레이드 런너>). 빈틈없는 시간 안에서 의지와 무능력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이 기괴한 놀이가 제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착하자 영화는 필립 K. 딕을 끌어냈으며, 할리우드는 그의 이름을 빙자해서 멋대로 각색하였다. 열혈 팬들은 비분강개하였고, 대학원생들은 이론적 각색을 동원해서 라캉과 보드리야르의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명단은 점점 불어났으며, 각색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오우삼이 할리우드에서 6번째 만든 영화 <페이 첵>은 필립 K. 딕 소설의 (텔레비전물을 제외하고) 8번째 영화화이다.
먼저 오우삼 버전. 미래세계. 프로그램 분해공학자 제닝스(벤 애플렉)는 알콤이라는 거대기업으로부터 9천만달러의 주식을 ‘페이 첵’(급료)으로 제공받는 대신 3년 동안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조건이 붙은 일을 한다. 그러나 보수를 찾기 위해 은행을 갔을 때 제닝스는 자신이 직접 서명한 주식포기각서와 그 대신 보관한 19개의 하찮은 물건이 든 봉투를 받는다. 게다가 총을 든 사나이에게 쫓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찮은 물건들은 그를 구하는 구사일생의 도구가 된다. 제닝스는 레이첼(우마 서먼)을 다시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3년 동안 개발한 것은 미래를 보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그 결과가 핵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제닝스는 ‘자신이 미리 본 미래를 따라가면서’ 악전고투한 것이다. 물론 ‘완벽한’ 해피 엔딩.
그 다음은 필립 K 딕의 버전. ‘거의 2년 동안’ 레이첵 회사에서 일을 하고 기억을 삭제 당한 제닝스가 살고 있는 미래는 강력한 정부에 의한 관리사회이다. 제닝스는 ‘페이첵’ 5만불(환율상승) 대신 7개의 하찮은 물건을 받았고, 정부의 추적을 당하는 제닝스는 ‘의문의 여인’ 켈리와 함께 레트릭 본사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담판을 지을 작정이다. 자신을 회사의 운영진에 포함시켜 달라고. 거기서 제닝스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미래에 있을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불길한’ 엔딩.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미래가 아니라 자기 시대와의 매듭에 있다. 필립 K. 딕이 1953년에 쓴 소설은 냉전시대의 창백한 아메리칸 ‘드림’의 히스테리이다. 그 세상은 조지 오웰적 비전과 매카시즘의 공포가 가득 찬 구조의 억압과 엄격한 예정인과율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제닝스는 사실상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전모를 알 길이 없는 위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질문한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 질문은 불만족스러운 ‘드림’이다. 오우삼이 2004년에 만든 영화는 이라크 전쟁시대의 비만한 아메리칸 드림의 판타지이다. 여기서 미국은 세상의 시간을 걱정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잉여를 제거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의 강박증에 빠진다. 그래서 제닝스는 사실상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맹목적인 액션에 매달린 채 주어진 상황의 비극적 현실을 잊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미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불가능한 ‘드림’이다. 불만족과 불가능 사이에서 왕복 달리기를 하며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미국’이라는 침대 위의 끔찍한 몽유병의 나르시시즘. 그 옆에서 횡설수설하는 남의 잠꼬대를 참고 들어주는 것은 정말 지겨운 일이다. 그런데 참, 오우삼 당신은 왜 그 침대에 ‘비둘기를 날리며’ 함께 누워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