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데뷔 20주년 재일교포 영화감독 최양일 회고전
2004-01-2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하드보일드와 블랙코미디 속에 담긴 이방인의 목소리

1980년대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통해 일본영화의 한켠을 채워오고 있는 최양일 감독의 회고전이 2월3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고등학교 시절 조명부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최양일은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83년작 로 데뷔하면서 최양일식 하드보일드의 신호탄을 터뜨렸다. 그후 최양일은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꽃의 아스카 조직> <막스의 산> 등에서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이어갔고,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헤이세이 무책임 일가, 도쿄 디럭스> <개 달리다> <형무소 안에서> 등에서는 블랙코미디를 덧붙여갔다. 하드보일드와 블랙코미디에 같은 무게의 관심을 보이면서(동시에 핑크영화의 맥락을 희미하게 유지해가면서), 최양일은 ‘기타노 다케시가 정적이라면, 최양일은 동적’이라는 평을 얻기도 한다. 주제 측면에서 국내에 익히 알려져 있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개 달리다>를 통해 재일한국인이라는 그의 소수민족 정체성이 두드러지게 특징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최양일은 초기작부터 끊임없이 일본 내 주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회현상에 카메라를 들이대온 감독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 속에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 마이너리티 집단의 생존문제, 세대 격변에 따른 간극 현상, 문화와 민족의 다종성이 갖는 낯섦 등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들로 가득하다. 총 14편의 영화 중, 이번 회고전에 상영될 작품은 모두 10편이며, 6일에는 영화평론가 김영진씨가 강연을 한다.

데뷔작 부터 최근작 <형무소 안에서>까지 10편 상영

20년이 다 돼도록 순찰 주임만 하고 있는 말단 경찰관이 빚 독촉을 못 이겨 은행을 털게 된다는 1983년작 는 최양일이 일본사회에 던진 첫 번째 질문과 스타일이다. 한 평범한 경찰관이 미치광이 범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차갑게 바라본다. 1984년작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다>는 아카가와 지로의 미스터리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소녀판 하드보일드영화이다. 아버지의 실종으로 인해 사건에 끼어들게 된 한 소녀가 일상에 숨겨진 진실들을 마주하면서 성장해간다. 1985년작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최양일의 첫 번째 작품이다. 오키나와의 작은 항구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의사가 악덕 건설회사와 그에 결탁한 부패 형사를 상대로 정의의 싸움을 벌인다. 기타가카 겐조의 동명소설을 각색했다. 다카구치 사토스미의 만화를 영화화한 1988년작 <꽃의 아스카 조직>은 뉴 가부키 타운의 두 거대조직이 지배권 쟁탈전을 벌인다는 설정하에 주인공 아스카가 복수극을 펼쳐나간다는 내용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이다. 1989년작 〈A샤인 데이즈>는 일본내에 뿌리박힌 미국 문화를 들여다본다. 록 가수가 꿈인 에리는 오키나와의 미군 전용 클럽 밴드의 일원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져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만 간다. 〈A샤인 데이즈>는 오키나와의 1968년에서 1975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1993년에 최양일의 대표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가 만들어진다. 제일한국인 택시기사와 필리핀계 여인 코니를 주인공으로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삶을 코믹하게 반영한다. 1995년작 <헤이세이 무책임 일가, 도쿄 디럭스>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온 가족이 도쿄를 헤집으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영화이다. 최양일은 예민한 사회적 문제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한 가짜 집단의 코믹함을 통해 따뜻함을 선사한다. 1995년작 <막스의 산>은 다시 한번 녹슬지 않은 최양일식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선보이고, 1998년 <개 달리다> 역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의 스타일을 넓혀 아시아적 관계를 고찰한다. 2002년 최양일의 최근작 <형무소 안에서>는 실제 감옥생활을 그린 만화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이다. 바깥 세상보다 더 평온한 감옥생활이 등장해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10편의 영화가 이번 회고전을 통해 최양일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추천작4편

10층의 모기 1983년/ 컬러/ 108분

최양일의 데뷔작. 20년 가까이 승진하지 못하고 말단에 머물고 있는 경찰관은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딸에게는 무시당한다. 매달 마련해야 할 위자료와 양육비에 허덕이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모터보트 경기에 내기돈을 걸게 되고, 거기에서 날린 돈을 채우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는다. 빚은 쌓여가고 고리대금업자들은 경찰서에까지 찾아와 그를 협박한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결국 경찰관은 반 미쳐 있는 상태로 우체국에 난입하여 돈을 강탈한다. 사회의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변두리로 밀려나고야 마는 경찰관 역을 70년대의 록스타 우치다 유야가 맡았다. 모터보트 경기장의 바람잡이로 별안간 등장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카메오 출연도 흥미롭다. 무력함으로 시작하여 잔혹함으로 끝나는 하드보일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년/ 컬러/ 109분

재일한국인 강충남은 그의 학교 동창 세이이치가 운영하는 택시회사에서 기사 노릇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간다. 오직 여자에게만 인생의 에너지를 쏟는 충남은 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코니라는 필리핀계 여성을 만난다. 충남이 코니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동안 회사는 부도가 나고, 택시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즈음 충남과 코니의 관계도 악화되어가고 코니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양석일의 <택시 광조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해 <키네마준보> 1위를 차지하면서 최양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알렸다. 하드보일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던 최양일은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 하층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일본의 현재를 비추는 블랙코미디를 만들었다.

막스의 산 1995년/ 컬러/ 138분

도쿄의 어느 길거리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그 즈음 법무성 형사과장이 살해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사건의 수사에 참여한 아이다 형사는 뭔가 연관성을 주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내부의 알력관계 때문에 아이다는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연쇄적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들이 곧 과거 학생운동 내의 파벌싸움에서 시작된 피의 진혼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한 다카무라 가오루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막스의 산>은 최양일의 돌아온 하드보일드이다. 최양일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꼼꼼하게 역사와 스타일을 접목시킨다. 아이다 형사 외에도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사건의 숨은 진면목으로 관객을 이끈다.

개 달리다 1998년/ 컬러/ 110분

신주쿠 경찰서 소속 나카야마, 그리고 그의 재일한국인 정보원 히데요시(수길)는 중국 상하이 출신 모모를 동시에 좋아한다. 히데요시의 고향 후배이자 폭력조직 애호파의 두목 곤도(호남) 역시 모모를 좋아한다. 어느 날 모모가 곤도에게 살해당한 뒤 히데요시는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경찰과 곤도 일행에게 동시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목 그대로 모두 ‘개’ 같은 삶을 살아간다. 살인, 마약, 매춘 등이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대변한다. 사회가 주시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들이 쫓고 쫓기며 미치도록 신주쿠를 달린다. 그러다가 영화는 아시아인의 삶과 웃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최양일의 사회적 탐문이면서 스타일적 혼합이기도 한 대표작.

상영시간표 일시 : 2월3일(화)~ 2월8일(일) /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 1회 관람료 : 6천원(강연 무료) 문의 : 문화학교 서울 01-743-6003 www.cinephile.co.kr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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