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는 과연 자신만의 독특한 무협장르를 개발하게 될 것인가? 최근 이광훈 감독의 <천년호>(사진)에 대한 평을 쓰면서 이 생각이 떠올랐다. <천년호>는 홍콩 무협·판타지영화들이 보여주는 저돌적인 에너지를 흉내내는 데 가장 근접한 한국영화이다. 그러나 최근에 만들어진 극소수의 한국 무협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화면 밖 중국 스탭들의 재능에 크게 기대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설정말고는 특별히 한국적이라는 영화적 정체성이 없었다.
한국영화는 다른 인기장르- 멜로드라마, 로맨틱코미디, 화장실 유머의 청춘물, 범죄물, 귀신 이야기, 역사 드라마 등- 에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새겨왔다. 그런데 왜 무협장르에 대해서는 독특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가? 타이영화마저 <옹박>으로 세계 액션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에 꽤 물을 만한 질문이다. 검술이 등장하는 무협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를 통해 토니 자(Tony Jaa)는 자국을 벗어나 해외에서 액션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0년대에 한국은 홍콩과 대만의 무협영화 촬영지이기도 했고 이들 영화산업계에 몇몇 (정창화 같은) 감독과 배우를 (때로는 중국 이름을 취하여) 수출했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무술오락영화(사극과 현대물)도 제작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무예(태권도와 합기도) 역시, 홍콩영화가 전유해버렸다.
실망스러웠던 <비천무>(2000)로 시작된 정통 무협장르의 부활은 <무사>라는 단 한편의 일급 대작과, 결점은 있지만 흥미로운 한편의 영화 <청풍명월>로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점에서 이들 영화는 제대로 된 “만화적인” 검술이 등장하는 무협영화이기보다는 액션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답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에는 무협영웅소설의 전통이나 확립된 무예(태권도와 합기도는 1950년대에야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가 부족하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현대 한국영화는 압도적으로 과거보다는 현대를 다루고 있어서, 매년 제작되는 영화 가운데 한두편만이 현대가 아닌 시대배경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검술 대신 현대적인 주먹질 난투극이 한국영화의 ‘무도’가 되어 영웅과 국민 정체성을 제공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차태현이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상상하지만, 이 상상은 <품행제로>에서 류승범이 태권도부를 날려버리는 상상이 갖고 있는 독특한 한국적 특성과 여운이 결여됐다. 그리고 어떤 아시아 감독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 등에서 류승완 감독이 이루어낸, 맨주먹이 갖는 더없이 진하고 장렬한 시적인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한국영화는 무예전통이 전부터 뼛속 깊은 이들(중국, 일본)에게 무협영화를 남겨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 같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한국 고유의 장르(이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을 만함)가 가진 우수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현대 “권도영화”를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라한-장풍대작전>이 무척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