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도약하기, 하늘 높이,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김하늘
2004-02-04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김하늘은 질문을 가린다.

일상에 관해서 물으면 짧게 답한다.

따져묻지 않는 한 그렇다.

연기에 관해서 물으면 장황하다.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얼마 전 하루 반을 꼬박 기다려 김하늘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공포영화 <령>의 밤샘 촬영을 끝냈다는데 목소리에 피곤은 묻어 있지 않았다. 마감에 쫓기던 터라 몇 가지 질문만을 던졌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면 서둘러 휴대폰을 접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은 틀어졌다. 외려 통화를 끝낼 무렵 미안하기까지 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동석했던 제작사 관계자와 매니저를 멀찍이 쫓아내고선 응대했다. 본인은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그랬다”지만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닥터K>(1999)를 끝낸 뒤 <해피투게더> <햇빛속으로> 등의 드라마에 출연하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PD들로부터 욕먹기 일쑤여서”만은 아니었다. 그걸 견디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피곤할 때면 매니저랑 미사리 근처로 드라이브를 했거든요. 한 바퀴 돌고 오는데 양수리 오픈세트에 조명이 켜져 있는 거예요. 왠지 모를 질투가 생기더라구요. 나도 저기 있고 싶은데 하는. 그걸 눈치챘는지 매니저가 저보고 아는 감독님이니 인사나 하고 가자고 했는데 싫다고 그냥 가자고 했어요.” 그런 직후 찍게 됐던 <동감>(2000)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관객의 반응 또한 나쁘지 않았으니.

성장을 멈춘 채 뒷걸음치던 19살 소녀 채영(<바이준>)으로 데뷔한 지 벌써 6년째다. 그동안 김하늘의 필모그래피에는 영화 5편과 드라마 4편이 쌓였다. 아직 ‘배우’라는 작위를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캐릭터로의 ‘몰입’을 즐길 수 있게 된 건 나름의 소득이다. 그래선지 그녀와 같이 작업한 감독들은 “촬영현장에서 집중력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빙우>의 김은숙 감독은 “힘들다고 자주 투정하지만 정작 슛 들어가면 제 욕심 채울 때까지 포기 안 하는 악바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몰입이 찬사만을 불러오는 건 아니다. “근데 저보고 다들 호흡이 너무 길대요. 감정을 잡기까지 오래 걸린다는 게 아니라 그걸 뽑아올려서 너무 오래 감정을 준다는 거죠.” ‘짧고 임팩트 있는’ 연기를 요구하는 코미디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많이 짧아지긴 했지만 지속되는 감정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단다.

개봉을 앞둔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하고 싶은 것 맘껏 해본” 코미디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수완은 지훈한테 일방적으로 당하잖아요. 당하는 것도 재밌긴 한데 아무래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죠. 이번에는 반대라고 여기시면 돼요.” 표정연기만으로 가석방을 따내고 거짓말로 어리숙한 시골약사 희철(강동원)의 약혼녀 자리를 꿰차는 주영주 역을 맡은 김하늘은 그동안 보여줬던 청순함과 귀여움을 적절히 믹스하면서 극을 이끌고 나간다. 주영주는 김하늘이 지금까지 빚어낸 캐릭터를 혼합해놓은 듯한 느낌까지 준다. “전반부가 사기 행각으로 인한 에피소드 위주라면 후반부는 왜 영주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줘야 해요. 마지막 장면에 영주가 언니를 만나는 장면에서 찡한 감정을 전달해줄 수 없다면 이 영화는 끝이다라는 각오로 찍었죠. 언니의 결혼식 장면에서 실제로 눈물이 핑 돌았으니까.”

부담도 적지 않았다. 강동원과 투톱 시스템을 이루긴 했지만 영화 전체의 리듬을 좌우하는 건 전적으로 김하늘의 몫이었기 때문. “전과 다른 게 스탭들이 다 저만 쳐다보고 있죠. 동원씨야 아무래도 영화가 처음이니까. 그러니 힘들어도 찡그릴 수 있나요. 만날 웃을 수밖에.” 리드해야 했던 만큼 현장에선 철저히 ‘캔디’였다는 김하늘. ““윤홍식 촬영감독님이랑은 <빙우>에 이어 또 같이 일하게 됐는데. 이번에 저보고 많이 노련해졌다고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힘들 때면 김하늘은 할머니 역을 맡은 김지영 씨에게서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꼭 붙어 있었던 건데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길 해주시더라구요.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얘기를 들으면서 충전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연기만 할 거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눈이 굉장히 맑으세요. 주름이 생겼지만 눈빛만으로도 연기를 할 수 있구나. 연륜이라는 게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요즘 김하늘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령>의 촬영을 5회 정도 끝냈는데 NG가 너무 많아요. 멜로나 코미디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 호기심으로 공포영화를 선택했는데 정작 연기할 때 음산한 음악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표정 지으려고 하니 쉽지 않더라구요. 공포영화는 봐도 죄다 눈감고 봐서 상상하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요즘은 유년 시절을 떠올려요. 친구들이 새침데기라며 따돌렸던 시기 말이죠. 너 왜 째려보냐고 저를 멀리했었거든요. 내 눈이 정말 그런가 싶어 하루에도 수십번씩 거울을 보고 그랬는데.” 2년 전 익사사고로 기억을 잃은 대학생 지원 역을 통해 “서늘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발산하고 싶다는 김하늘은 그 대가로 당분간 현실에서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꿈꾸면 매번 천상을 봐요. 햇빛에 반사돼서 반짝반짝한 강 위를 매번 날거든요.” 멜로와 코미디의 자장에서 벗어나 호러의 밑바닥으로 진입한 김하늘, 단번에 퀸의 자리에 오를 순 없겠지만 핏기 가신 얼굴 하나를 더 얻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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