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새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04-02-10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뭐…그저 그렇고 그랬지만…중년 미국남자 도쿄에서 일주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는 ‘Lost In Translation’)는 단순한 이야기 안에 많은 단상과 감정을 실어나르는 매력적인 영화다. 중년의 한 미국 남자가 일로 도쿄에 갔다가 딸 뻘되는 미국 여자를 만난다.

배우인 남자는 일본에 산토리 위스키 광고 찍으러 갔고, 여자는 사진작가인 남편의 출장에 따라왔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탓에 자주 마주친다. 남자는 일에든 가정에든 활기를 잃은 상태이고, 결혼 2년차의 젊은 여자는 자기 삶의 갈피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연해진 상태다. 말 안 통하는 낯선 도시의 공간은 고립감을 가중시키고, 그로 인해 남녀는 서로를 아는 정도에 비해 더 깊은 동지애를 느낀다. 소통의 단절을 받아들이고 나면, 적은 것으로도 많은 소통을 하게 되는 법.(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소통을 요구하며 산다, 혹은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산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 모두 맥이 없다. 여기저기 찾아나서거나 영어가 되는 일본인을 만나 그곳의 문화를 탐해볼 수도 있을 텐데, 고층 호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있거나(여자) 혼자 호텔의 수영장과 헬스클럽과 바를 전전한다(남자). 그러니까 겁이 많고 열정이 대단히 크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이다. 둘이 남달리 외로울 이유도 없다. 중년의 위기라지만 남자는 부인에게서 형식적이나마 매일같이 안부전화가 걸려오고 자식들을 보고 싶어한다. 여자도 남편과의 관계에 이렇다 할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의 로맨스가 극적으로 치닫기 힘들다는 건 일찍부터 읽힌다.

우리말 제목엔 ‘사랑’이란 단어를 넣었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에 주목하기보다, 이 보통 남자의 일주일 도쿄행에 동승해 그의 눈과 머리, 가슴에 다가오는 풍성한 디테일에 푹 빠져들(원제처럼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영화다. 도쿄 고층건물의 감각적인 광고판과 시끌벅적한 사람들, 수다스런 텔레비전 쇼, 극한의 관음증을 연출하는 나체쇼 클럽 등은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하고 시간대가 불명확한 듯하면서도 동시대적이다.

옅은 블루 톤으로 찍힌 도쿄 시가지는 조금 멀리서 비추면 이내 우수를 머금는다. 여하튼 그 풍경을 우리가 보면서 어떤 단상을 갖는다. 동시에 국외자인 이 남자의 눈으로도 그걸 본다. ‘나는 이걸 봤는데 당신은 뭘 봤어’ 하는 식으로 그 남자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둘이 공감할 땐 기꺼이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객지의 스산함과 외로움도 함께 깊어진다. 남자 역의 빌 머레이는 미남은 아니지만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 좋은, 편안한 얼굴이다.

대사가 적고 여백이 많은 이 영화는 인물의 심리를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해주지 않는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극적인 계기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건 남자와 여자의 작별 키스, 그리고 남자의 귀향이지만 거기까지 설레임, 갈등, 자책 등의 복잡한 심리가 이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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