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의 한 장면. 하이데거를 공부하는 철학박사 피에르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서 찾아온 연극배우 카미유를 다락방에 가두고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미유는 그날 저녁 피란델로의 공연에 늦지 않게 돌아가야만 한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카미유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옥상으로 열리는 창문을 열고 지붕을 걸어서 바깥으로 나온 다음 극장으로 간다.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될 거야>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런 ‘신기한’ 영화이다.
첫 번째. 이 영화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펼쳐지면서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를 성립시킨다. 매번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이야기는 거기에 비상문이라도 있는 것처럼 열고 나와 다시 다른 이야기가 되면서 어리둥절한 순간을 마술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 거기서 삶은 무대이고, 세상은 극장이다. 리베트에게 산다는 문제는 결국 시행착오의 리허설이다. 혹은 세계는 연극이며, 사건은 드라마이다. 등장인물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삶의 무대에 오르면 되고, 사라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내려가면 된다. 등장과 퇴장은 리베트 영화의 비밀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신기하게 만든다.
모두 여섯 명의 등장인물.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 카미유는 3년 만에 연출자 위고와 함께 피란델로의 연극 ‘당신이 나를 원하면서’를 공연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다. 카미유는 옛 연인인 철학교수 피에르를 다시 만나는데, 그는 지금 발레리나 소냐와 살고 있다. 한편 위고는 골도니의 미간행 희곡을 찾다가 대학생인 도미니크를 알게 된다. 도미니크에게는 이복오빠 아튀르가 있는데, 그는 소냐와 불륜의 관계이다. 이 여섯 명은 카미유가 나타나자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넘어지면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다.
어리석은 감정의 잡담들과 교활한 계략의 속임수들이 빚는 무한한 변주에 따른 희극과 드라마의 무대. 리베트는 카미유를 이 소동의 중심에 놓고 그걸 기이할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삼각관계를 놓고 수학의 구조를 만든다. 계속 새로운 연애의 조합이 만들어지고, 관계의 구조는 안정을 찾아서 사랑의 방정식을 다시 세운다. 리베트 영화의 위대한 점은 그걸 보는 동안 공범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 구조의 무대화되지 않는 잉여의 투명성으로 당신을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여기에 위고는 이탈리아인이면서 파리에서 만년을 보낸 카를로 골도니의 삶을 재현한다. 골도니가 1771년 12월 19일에 보냈다는 미발표 희곡 ‘베니스의 운명’을 찾는 위고의 외로운 노력은 사실상 파리에서 부패한 코메디아 델아르테의 희극과 싸우면서 ‘작은 리얼리즘’을 찾으려 했던 이탈리아인 골도니의 삶과 닮아있다. 그 이탈리아인은 독일철학에 심취한 철학교수와 카미유를 놓고 대결을 신청한다. 리베트는 그렇게 피란델로를 끌어들이면서 (혹은 하이데거를 조롱하면서) 한편으로는 골도니에게 경배를 바친다.
세 번째 매듭. 리베트가 그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영화적 배움은 에른스트 루빗치와 사샤 기트리의 연극적 영화의 전통에 서서 하워드 혹스의 저 코미디와 드라마의 조화 속의 투명함, 혹은 롯셀리니의 후기 영화적 전통, 즉 대답을 얻을 때까지 촬영을 멈추면 안 된다는 무한정한 드라마의 리좀에 몸을 내맡긴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저 악명 높은 리베트의 완만한 기다림은 이번에는 2시간 37분 만에 대답을 얻는다.
그 대답의 장면. 결국 삶은 리허설이다, 라고 말한 자크 리베트의 믿음은 여기서 기적 같은 엔딩을 얻어낸다. 그 장면에서 세상은 무대와 하나가 된다. 혹은 무대 위에 세상이 놓인다. 그 순간 철학자 들뢰즈가 경탄한 그 한 마디, 리베트의 극단적인 주관성은 결국 가장 객관적인 현실을 창조한다는 마술이 이루어지고야 만다. 신기한 깨달음. 당신의 삶은 결국 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