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서사극 스케일의 멜로드라마, <콜드 마운틴>
2004-02-17
글 : 김혜리
미국 남북전쟁 시대로 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사랑

피투성이 대지에 한 병사가 서 있다. 도랑에는 피가 흐르고 바위와 나뭇등걸은 피묻은 손자국으로 붉다.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아직 죽지 않은 남자는 기다리겠노라하던 고향의 여인을 생각한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무엇을 봤는지 모두 알고 나면 당신은 다시는 내 무릎에 그처럼 다정히 기대지 않겠지요. 행여 내 안에 좋은 것이 있었다면,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콜드 마운틴>의 남군 병사 인만(주드 로)에게 영혼은 영원히 강건한 신의 선물이 아니라 돌보지 않으면 허약해지는 무엇이다. 그는 어색한 첫 키스를 나눴을 따름인 에이다(니콜 키드먼)가 진짜 사랑이었는지, 그녀가 철저히 파괴된 자신을 알아봐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피터스버그 전투의 부상으로 버지니아 병원에 후송된 인만(주드 로)에게 날아든 편지는 그의 상한 육신을 일으켜 세운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여의고 황폐한 농장에서 생존의 투쟁을 치르고 있는 에이다는 호소한다. “전투를 하고 있다면 전투를 멈추세요. 행군하고 있다면 행군을 멈추세요. 청컨대 내게 돌아오세요.” 모든 의구심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는 인만에게 정언 명령이다. 어느 새벽 어스름 속에서 그는 고향 콜드 마운틴을 향해 생사를 건 탈주에 오른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사랑은, 하나의 장소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여인의 등줄기를 사막의 언덕에 오버랩하고, 여인의 빗장뼈에 해협의 이름을 붙였던 밍겔라는 <콜드 마운틴>에서도 인만의 입을 빌려 “내가 돌아가야 할 장소는, 그녀”라고 말한다. “힘센 자들이 땅 위에 그어놓은 금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국가’예요”라고 속삭였던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캐서린을 기억한다면, 인만의 탈영은 반역은커녕 그 반대 행위인지도 모른다. 전쟁은 모든 인물이 희생자여야 한다는 훌륭한 멜로드라마의 규칙을 자연스럽게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잉글리쉬 페이션트>와 <콜드 마운틴>을 통해 서사극 스케일의 멜로드라마에 귀재를 드러낸 앤서니 밍겔라는 제대로 파악하고 이용한다.

애틋한 스토리, 복합적 캐릭터, 유머와 서스펜스에도 불구하고 찰스 프레이저의 원작소설 <콜드 마운틴>은 영화로 옮기기에 난해한 소설이다. 우선 연인들은 이야기 내내 멀리 떨어져 있다. 전쟁이 산산이 부숴놓은 세상을 통과하며 인만이 만나는 목사, 어린 미망인, 양치기 노파, 탈영병 사냥꾼의 피카레스크식 에피소드와 농장을 지켜내는 에이다의 이야기 사이를 드라마는 시계추처럼 왕복한다. 살생은 너무 노골적이고 빅토리아식 규범에 예속된 에이다와 인만의 연애는 너무 조신하다. 거의 최면에 가까울 정도로 인물의 내면 독백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장려한 자연 묘사에 많은 페이지를 소모하는 문체도 난제다. 문학 작품을 대중영화로 각색하려는 사람들에게 앤서니 밍겔라의 시나리오는 참고서가 될 만한 변형과 가감의 기술을 보여준다. 밍겔라는 인간성의 치유와 복원을 노래한 서사의 폭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19세기 미국의 역사와 자연은 원경으로 물리고 멜로드라마에 포커스를 맞췄다. 따라서 에이다와 인만의 관능적 접촉을 비롯한 섹슈얼리티 묘사는 강화되거나 심지어 덧붙여진 반면, 폭력은 몇개의 신에 축약됐다. 스타의 매력을 전시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감정은 최대한 직선적으로 다듬었다(그토록 길고 지난한 여정의 동기로는 니콜 키드먼의 아름다움이, 관객이 그 고난스런 여행을 인내하는 데에는 주드 로의 미모가 적잖은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밍겔라는 여전히 관객의 눈물을 포기할 수 없는 낭만시인이다. 텅 빈 교회에서 인만이 에이다를 위해 흰 비둘기를 손 안에 불러들이는, 원작에 없는 장면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예배당 벽화신을 추억하게 만든다.

오스카 맞춤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니콜 키드먼, 주드 로, 르네 젤위거 가운데 최대 수혜자는 뜻밖에도 주드 로다. <리플리>에서 그를 지중해의 태양처럼 찍었던 앤서니 밍겔라와 존 실 촬영감독은, 많은 영화에서 아름다우나 어딘가 왜소함을 떨치지 못했던 주드 로의 얼굴에서 근사한 음영을 발견했다. 반면 니콜 키드먼은 스칼렛 오하라식 캐릭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걸어다니는 서바이벌 가이드’ 루비 역의 르네 젤위거는 큰 동작과 표정으로 발산하는 유머와 활력이 압도적이지만 예상을 넘어서는 해석은 없다.

<지옥의 묵시록> <대부>의 편집기사로 밍겔라의 전작에도 함께했던 월터 머치의 커팅은 대범하다. 과거와 현재, 인만과 에이다를 성큼성큼 오가는 영화의 행보는 감정의 집중과 폭발을 구하는 관객을 좌절시키는 맹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콜드 마운틴>은 드문드문한 문장과 삽화가 너무 아름다워 자발적으로 행간을 채워넣게 만드는 핸섬한 멜로드라마다. 에이다와 인만의 사랑은 완결된 사랑이 아니기에 ‘그’와 ‘그녀’로 대변되는 더 큰 삶의 갈증으로 승화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콜드 마운틴>이 기억된다면, 그것은 아마 인만과 에이다의 뜨거운 포옹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를 지배하는 기나긴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일 것이다.

:: 니콜 키드먼의 <콜드 마운틴> 체험담

“밍겔라 코쿤 속에서 살았죠”

“앤서니 밍겔라가 감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완벽한 인선이라고 생각했다. 앤서니는 감독, 시나리오 작가, 극작가인 것 못지않게 한 사람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시인의 본성은 그의 모든 작업과 <콜드 마운틴> 전체에 스며 있다. 앤서니의 연출방식은 관대하고, 배우들 모두가 거할 수 있는 일종의 누에고치, ‘밍겔라 코쿤’을 만들어냈다. <콜드 마운틴>의 캐스트는 다양한 배경과 연령층, 계층의 조합이었다. 아침 식탁에 아일린 앳킨스, 캐시 베이커, 르네 젤위거, 주드 로 등과 앉아 있을 때면 내가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가 않았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마련인 보통 영화작업과 달리, <콜드 마운틴>은 일정한 시기 우리의 삶 자체였고 영화가 그렇게 변하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은 마술이며, 유랑극단의 집시가 된 듯한 느낌이다. 루마니아에서의 긴 합숙생활 동안 우리는 서로를 정말 잘 알게 됐다.

나는 원작이 처음 출간됐을 때 읽었고 즉시 마음을 사로잡혔으나 너무도 감각적이고 내면적인 책이라 어떻게 영화가 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앤서니 밍겔라의 천재성이 필요한 것도 그 대목이었을 것이다. (중략) 원작자 찰스 프레이저가 현장을 찾아 만족을 표해주어 크게 안심했다. 특히 르네와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하는 자매애를 보여준다. 에이다와 루비는 상극이지만 서로를 가르치고 돕게 된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 영화 만들기도 그런 작업이다. 서로 다른 국적의 이질적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한데 모이는 것, 그것이 영화 만들기다.”자료제공 브에나비스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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