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빌 머레이
2004-02-18
글 : 박은영
그 고집불통, 나를 웃기네…아니 울리네

빌 머레이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다. 그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를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코믹한 분신들이 그러하고, 그의 영화 안팎 행보가 그러하다. 역시 의외의 선택으로 보이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그의 연기는 전혀 새로운 경지다. 낯선 별에 떨어진 몽유병 환자처럼 피로와 권태가 그득한 눈으로 그는 묻는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나이가 들면 삶이 나아진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중년의 위기’를 온몸으로 체현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헛헛한 웃음 뒤에 울컥 슬픔이 밀려든다. ‘우리를 눈물이 나도록 웃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우리를 울게 하는 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진리를, 그는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다.

빌 머레이는 색깔이 뚜렷한 코미디언이다. 시카고의 극단 세컨드시티에서 연기 수업을 받은 그는 명실상부한 코미디언 배출양성소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등장하면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냉소적이고 불손한 유머는 귀신 잡는 과학자라는 모순된 캐릭터(<고스트 버스터즈>)로부터 주치의를 패닉상태로 몰아가는 조울증 환자(<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라붙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같은 하루의 순환 속에 갇혀버리는 기상 캐스터(<사랑의 블랙홀>)의 개과천선에 수줍은 로맨스의 기운을 불어넣은 빌 머레이는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 괴짜 소년의 후원자이자 연적으로 등장해 ‘웃기는 남자’ 딱지를 떼는 데 성공한다. 코미디 배우가 정극 연기를 시도했다는 데 대한 관객과 평단의 저항이 없지 않았지만, 빌 머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밥 호프도 짐 캐리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험프리 보가트다”(<롤링스톤즈>)라는 ‘인식의 전환’은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희극의 주인공처럼 자기 모드대로 돌진하는 빌 머레이는 동료들과 종종 불화를 빚곤 한다. <형사 매드독> 촬영장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코를 부러뜨린 일이나 <미녀 삼총사> 촬영 중 루시 리우와 다퉈 속편에 출연하지 않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 연락이 닿지 않거나 만남을 거부하거나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는 그의 ‘인내력 테스트’에서 탈락한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반면 한번 맺은 인연은 오래 끌고 가는 편으로, 아이반 라이트먼과 해롤드 래미스, 웨스 앤더슨은 까다로운 그가 선택한 영화 동지들. “기분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에 있어선 누구 못지않은 프로”라는 게 그들의 변호다.

냉소적인 인물로 알려진 빌 머레이는 사실 로맨스 예찬론자다. “센티멘털하지 않으면서 로맨틱한 그런 영화, 죽거나 병들거나 배신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 세상 모든 로맨스에는 코미디가 내재한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웃을 때 우린 더이상 외롭지 않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염원했던 로맨틱한 변신을 이룬 그는 오스카 수상 영순위에 올라 있지만, 지금은 그저 웨스 앤더슨의 신작 <라이프 아쿠아틱>의 촬영을 끝냈다는 사실에 더 큰 포만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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