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재활훈련센터에서 목공일을 가르치는 중년 남성 올리비에. 5년 전 어린 아들이 또래의 소년에게 살해당하고 그로 인해 아내와도 헤어진 그는 매일 그가 만지는 목재처럼 딱딱하고 표정없는 삶을 살아간다. 5년동안 소년원에서 복역하고 나온 아들의 살인범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들어오자 프란시스는 처음의 거부의사를 번복하고 소년을 자신의 학생으로 받아들인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으로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자식의 살인범을 만난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화가 이를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를 그리거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용서를 그리거나. 절망적인 빈곤의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찾아헤매는 소녀를 그린 <로제타>로 9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벨기에 다르덴 형제가 감독한 <아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영화는 어떤 줄거리인지 모르고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는 인내심의 바닥이 보일 만큼 오랫동안 설명 없이 무미건조한 올리비에의 일상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단 한순간의 한눈팔기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올리비에의 얼굴만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움직인다. 그것도 올리비에의 번민하는 눈빛이나 떨리는 턱선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뒷통수를 응시하는 데 할애한다. 게다가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이라고는 간략한 대사와 작업실의 톱질이나 등장인물들의 발자국 소리 등이 전부다. 이처럼 느리면서도 숨을 조이는 화면은 손쉬운 몰입을 끊임없이 차단하면서도 관객이 올리비에의 내면으로 조금씩 들어가도록 유도한다.
아들의 살인범을 가르치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전 아내는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고 불같이 화를 낸다. 올리비에는 대답한다. “나도 모르겠어.” 본인도 그 실체를 정확히 모를 분노와 증오, 호기심 등이 섞여 있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는 16살 소년 프란시스를 만난다. 물론 소년은 모든 사실을 모르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자신의 후견인이 돼달라는 요청까지 한다. 휴일날 프란시스를 데리고 형이 하는 목재소에 찾아가는 운전 길에 올리비에의 충돌하는 감정은 최고조에 이른다. 살의와 적개심, 슬픔과 연민으로 휘청대는 올리비에의 모든 감정이 시종 운전석 뒤에 앉은 카메라에 비치는 뒤통수를 통해서 경이로울 만큼 섬세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말미에 용서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 순간 툭 끊기듯 화면을 ‘종료’시킴으로써 어떤 결말도 내리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전작들에서도 그랬듯 <아들>을 통해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의 윤리적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삶이 불확실하듯 그 선택은 일도양단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선택도 개인에게는 또 다른 족쇄가 된다. 다르덴 형제의 극영화에 계속 출연해 왔으며 <아들>에서 주연을 맡은 벨기에 배우 올리비에 구르메는 이 영화로 2002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