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싸우고 있다면 싸움을 멈추세요. 행군하고 있다면 행군을 멈추세요. 제게로 오세요. 간청합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부상당해 병상에 누운 인만(주드 로)은 두세달 전에 부쳐진 아이다(니콜 키드먼)의 편지를 그제야 받았다. 아이다는 고향 ‘콜드 마운틴’에 두고 온, 사랑하는 여자다. 편지엔 아이다의 힘든 사연이 촘촘히 적혀 있다. 인만이 떠난 뒤 아이다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죽었고,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막막한 채 겨울을 맞았고, 마을에서 악명높은 수비대장이 수시로 자신을 넘보고, 그런 상황을 버텨낼 자신이 없다는…. 앞의 인용문에서 ‘제게로 오세요’라는 간청 앞에 붙은 두 문장이 주는 울림이 크다. 그 힘없는 명령체는 역설적으로 몸과 마음을 붙잡아 일으키는 강력한 선동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붙잡히면 사형인 탈영을 선동한다. 그래서 사랑 같다. 며칠 뒤 인만은 병원을 탈출해 480㎞ 멀리 떨어진 콜드 마운틴으로 향한다.
전쟁은 저절로 드라마를 만든다. 뉴스는 요란하지만 일상은 지루하고, 휴대전화가 편지를 대체한 요즘에 150년 전 전쟁에서 힘겹게 전달된 한장의 편지에 운명을 거는 남녀의 이야기는 애잔한 데가 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이 영화 〈콜드 마운틴〉에서도 남녀 사이의 애잔한 감정을 시간과 장소의 간극 안에 녹여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그 간극의 이유가 전쟁인 한, 남녀의 감정에 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인만의 귀향길은 모험의 연속이다.
여자들의 유혹에도 직면하고, 탈영병 사냥꾼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은둔해 사는 노파를 만나 도움을 받는 그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연상케 한다. 가냘파 보이기만 하던 아이다는, 억척어멈 같은 루비(르네 젤위거)를 만나 강인한 여자로 변해간다. 인만과 아이다의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교차편집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된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영화는 좀더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 아이다의 마을에서 수비대장과 대원들이 지독한 만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그게 무척 잔인하게 표현된다. 6·25가 그랬듯, 내전에선 후방에서 완장 찬 이들의 만행이 극심했을 테지만 이 영화에선 그 폭력이 아이다의 목을 죄고 있음이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인만과 아이다는 전쟁 전에 깊이 사귀지 못했다. 암묵적으로 감정을 확인하고 그 징표로 한차례 입맞춤을 나눴을 뿐이다. 각자에게 상대방은 ‘우린 서로를 잘 모르지 않냐’는 둘의 대화처럼 사람을 알기 전에 감정이 형상화돼버린, 상징 같은 존재에 가깝다. 그런 느낌의 사랑이, 둘 각자의 고난과 고독을 좇는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린다. 거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아이다를 만행에서 구해줄 기사로 인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초점이 빗나간 욕심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애잔한 느낌이 줄고 많이 보아온 영화가 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