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엉터리 시대활극, <라스트 사무라이>
2004-02-20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기모노 입은 백인 전사 <라스트 사무라이>

한마디로 그 내용이 너무나 감상적이고 진부하다는 점에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좀더 색다른 방식의 무용담이라 할 수 있을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 버금가는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이 엉터리 시대활극이 시작과 더불어 완전히 좌초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가히 모욕에 가깝도록 황당하고 장황하기 그지없는 문구로 (일본은 “지금은 모두가 잊어버린 듯한 가치-명예”,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수 있는 “단 몇명의 용감한 사나이들에 의해 이룩되었다”라는 따위의) 시작될 때, 이 사실은 명확해진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견 전쟁영화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늑대와 춤을>의 기모노 의상 버전이라고나 할까? 톰 크루즈는 영화 속에서 한때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자신이 몸담은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적의 편에 서게 되는 기병대 출신 장교 네이든 알그렌 역을 맡았는데, 무대 위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이 심사 뒤틀린 주정뱅이는 자신의 전직 상관 조지 커티스가 부하들을 또 다른 학살의 현장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해하기 힘든 고약한 반응을 보인다.

알그렌은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보기에도 능글맞은 일본 대신에게 고용되는데, 그의 임무는 천황의 군대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것. 특히 젊은 메이지 천황은 사무라이 집단의 반란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데, 누군가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여전히 미개한 사무라이 지도자의 항명”이라는 것이다. 잔혹했던 인디언 학살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알그렌은 탁월한 투사로서의 면모를 여전히 유지하는데, 안개 낀 밀림 속에서 미숙한 자신의 부하들이 전멸하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은 완전히 <킬 빌>의 우마 서먼으로 돌변해서는 두손에 칼을 쥐고 싸우다 홀로 살아남아 적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백인 정착민 여인이 흉악한 야만인들의 손에 납치된다”라는 식의 억류기는 미국 문화 속에서 가장 유서 깊은 허풍쪼가리라고 할 수 있는데, 올해 나왔던 론 하워드의 서부극 <더 미싱>이나 시청률 경쟁을 벌이며 화제를 모았던 제시카 린치와 엘리자베스 스마트의 다큐드라마 등이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는 상대적으로 덜 노골적인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서구에서 온 백인 남성과 그가 열도의 오지에서 만난 타자(他者) 사이에서 벌어지는 좀더 고상한 방식의 대결과 상호전이(相互轉移)의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알그렌은 자신이 전투에서 죽인 무사의 아내에게서 (너무나도 슬픈 눈매의 일본 여배우 고유키가 연기를 했다) 간호를 받는데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는 일본 술에 탐닉하고 서서히 젓가락질을 배우며 일본인들의 복장을 비웃기도 한다(그는 자신을 경호하는 무뚝뚝한 무사에게 “당신은 사람들이 치마를 입혀서 지금 화가 난거지?”라며 놀려댄다). 하지만 이 미국인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사무라이 집단의 수장인 카츠모토이다(와타나베 겐이 연기한 이 인물은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자비로운 부처님 상 아래에서 첫 만남이 이뤄진 뒤 둘의 대화는 벚나무 아래로 이어지는데, 알그렌이 그동안 만난 모든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어에 능통한 귀족 카츠모토 역시 미국 인디언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는 듯 보인다. 때문에 그는 인디언들과 싸워 이긴 알그렌의 옛 상사 커스터를 또 다른 종류의 사무라이로 평가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부터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가히 “케빈 코스트너주의(?)”라고 할 만한 알그렌의 무미건조한 관찰적 일기 낭독으로 넘쳐난다. “참으로 신비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이와 같이 절도있는 삶을 본 적이 없다”라든지 “사무라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식의 명상이 이어진다. 정말 사무라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늑대와 춤을>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전환 계기가 다가온다. 그는 기모노를 걸치고 (할리우드에서는 문젯거리가 아닐) ‘무념무상’의 화두를 깨우치려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무술을 연마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신은 미국인일 뿐이지만(그는 몇번이고 나뒹굴면서도 싸움걸기를 주저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도 한다).

영화가 이처럼 사전에 정해진 이야기의 흐름을 고만고만하게 따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톰 크루즈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일본어와 검도를 배웠고, 보도자료에 의하면 일본 역사와 전통극에 대해서까지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내용적으로 볼 때 둔하기 짝이 없지만,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액션에 재능이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닌자들의 기습공격 장면은 상당히 즐길 만하고(이 장면은 <늑대와 춤을>에서의 포니족 소탕 장면과 정확하게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사무라이들이 화살을 쏘며 기관총과 맞서는 장엄한 최후의 전투신에서는 장장 반 시간에 걸쳐 충돌과 살육, 말을 타고 죽음의 계곡으로 향하는 슬로모션, 전장에서의 마지막 작별 등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가히 뉴 에이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헛소리까지! “사람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고 믿네.” 이쯤 되면 승리한 쪽이 경의를 표하는 것이 다소 신기해 보이기까지 한다.

<라스트 사무라이>에도 어떤 여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여운은 너무나 엉뚱한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의 모델이 된 사이고와 그의 부대가 패배하면서 일본은 러·일전쟁과 중국 침략에 나서게 됐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을 여기에서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어쨌든 이데올로기라고 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한 스펙터클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배우들이 부도덕한 무기상으로 등장하고 서구화론자들이 악인으로 묘사되며 톰 크루즈라는 할리우드 스타가 천황을 사무라이식으로 훈계하는 것 등 역시 대수롭지 않게 봐넘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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