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시사회 참관기
2004-02-23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예수의 수난, 영화의 고난

잠잠하던 할리우드에 때아닌 종교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2월25일 드디어 관객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가 개봉을 불과 2주 앞두고, LA의 소니 스튜디오에서 해외 기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기까지 최후 12시간을 극히 사실적으로 그린 이 영화를 둘러싼 각종 논쟁은 지난 1월 ‘뉴 마켓 필름’이 배급을 확정한 이후, 급물살을 타고 미국 내 각종 언론을 장식해왔다.

이미 미국 내 1천명 정도가 각종 종교단체의 시사회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 온라인 티켓 서비스사의 개봉주말 예매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일반 관객의 관심도 뜨겁다. 영화 완성 뒤 근 1년 동안 배급사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는 등 이 문제작이 개봉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한편의 ‘수난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인데, 그 수난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이번 시사회에 주어진 과제다.

애당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둘러싼 논쟁이 종교라는 예민한 부분과 맞닿아 있는데다, ‘(영화적) 재현’ 과 ‘(역사적) 진실’ 사이의 긴장이라는 만만찮은 영화사적 문제를 제기하는 터라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 역시 여느 때보다 촉각이 곤두서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멜 깁슨 불참으로 배우들에 불똥

독실한 가톨릭 근본교 신자인 멜 깁슨이 사재 2500만달러를 들이고 기획에서부터 감독, 제작, 각본에까지 참여했다는 것이 화제일 만큼, 멜 깁슨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 있다. 그런데 정작 모든 해답의 열쇠를 쥔 멜 깁슨은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몸값 비싼 스타들이 종종 시사회 참석을 꺼리는 경우는 있어도 제작자나 감독이 시사회를 거르는 경우는 없는지라, 기자들이 낙담한 것은 당연지사. 홍보 담당자는 감독의 불참에 대해 공식적인 해명을 하는 대신, 멜 깁슨이 2월18일, <ABC>의 <프라임타임 라이브>에서 다이앤 소여와 독점 TV 인터뷰를 할 예정이라고 귀띔한다. 결국 시사회 자체의 유효성에 대한 성토로부터 멜 깁슨의 불성실한(?) 태도가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나름의 분석까지 인터뷰장은 각종 ‘이슈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날카롭게 곤두선 기자들의 화살은 인터뷰에 참석한 두 주연배우, 짐 카비젤과 마이아 몰겐스턴에게 돌아갔다. 논쟁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집요한 공세에 결국 두 배우는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채우지도 않고 15분 만에 인터뷰장을 떠나고야 말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무겁게 드리운 논쟁의 그림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약성서 마태, 누가, 요한, 마가복음서에 근거해 고증해낸 예수의 수난극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영화가 ‘반유대정서’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유대 종교단체의 비판이 제기되고부터이다. 유대반명예훼손연맹 등이 제기한 비판의 골자는 “영화가 유대당국과 유대인들을 예수 십자가 처형을 결정한 책임자들로 그리고 있다”는 것인데, 이후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고증해냈는다는 기독교 계열 종교단체의 반론 또한 제기되어 논쟁은 종교계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뒤이어 바틴칸의 교황이 영화를 관람하기에 이르렀고, 바티칸은 이 영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을 복음서의 설명에 따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교황이 직접 영화가 ‘사실 그대로’라고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바티칸이 이를 다시 부인하는 등 논쟁의 불꽃을 키우지 않으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왔다. 동시에 미국 내 에반겔리온, 가톨릭, 기독교, 유대교를 비롯한 종교단체들은 ‘유대인의 책임 소재’에 대해 각각 입장 표명에 고심하는가 하면, 유대반명예훼손연맹은 급기야 교황청에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위험한 매력, 놀랍도록 뛰어난 사실성

사실 마태복음 27장25절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는 문구가 서구 역사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해온 주요 근거 중 하나라는 것이 종교계의 해묵은 논쟁이었다. 바티칸이 1965년, 이 문구를 삭제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쪽에서도 이러한 오랜 불신을 해소하려고 노력해왔던 차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흐름에 역행한 것으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역사적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 수순일 터. 미국인의 60%가 성서가 역사적 진실이라고 믿는 반면,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수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쓰여진 복음서는 기록 당시의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객관적인 역사임을 의도한 적도 없을 뿐더러, 많은 부분에서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다고 말한다. 와의 인터뷰에서 멜 깁슨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그려낸’ 것이라고도 밝혔다. 그러나 인터뷰 말미에 자신은 성서가 ‘진리’임을 ‘믿는다’고도 말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멜 깁슨의 신앙 보고서라면, 다시 문제는 ‘믿음’이다. 시사회에서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믿음’과 ‘진실’과 ‘재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무성영화 시대부터 100여편에 이르는 예수의 수난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신성모독 논쟁이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논쟁이 남다른 것은 ‘사실적 재현’이라는 영화적 문제와도 관련있어 보인다. 이탈리아의 고도 마테라와 로마의 시네치타 세트에서 촬영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가장 위험한 매력은 놀랍도록 뛰어난 ‘사실성’이다. 할리우드 최고 솜씨의 분장과 세트, 17세기 화가 카라바지오풍의 매혹적인 촬영과 예수 당시의 언어인 아르메니아와 라틴어 대사까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그 이전의 어떤 종교영화보다 생생하게 과거를 스크린 위에 되살려놓았다.

그러나 문제는 최후의 12시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까지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이 모두 결여된 영화 속 예루살렘에서 선악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데 있다. 전후 맥락과 등장 인물마저 친절하게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아는 자’에게는 자명하나, ‘모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부호인 영화일 수도 있다. 할리우드식 선악구도는 예수를 처형하고 싶어하지 않는 로마 집정관 빌바도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예수를 처형하라는 유대인 폭도의 무리를 대비시키는 데서 두드러진다. 한편, 논란의 핵심이 됐던 마태복음의 구절이 삭제될 것이라는 뉴스 발표대로 문제의 대사는 시사회장 스크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ABC>와의 인터뷰에서 멜 깁슨은 사실 문제의 장면을 삭제한 것이 아니라, 아르메니아어로 말해지는 대사의 영어 자막을 지웠을 뿐이라고 내막을 밝혔다.

문제는 성모 마리아 역을 맡은 마이어 몰겐스턴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멜 깁슨의 비전을 그려낸 한편의 영화일 뿐”이라는 관점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진리 주장’이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둘러싼 논쟁은 남북전쟁을 인종 차별적인 왜곡된 시각으로 그려낸 G.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때 그 ‘놀라운 사실적 만듦새’를 칭송받으며 미국 각급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처럼 보여졌던 영화사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재현의 사실 같음’이 ‘사건의 사실성’을 보증하는 듯 작용할 때의 위험성이 아마도 많은 이들을 논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두 주연배우는 아무래도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약간은 피로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씬 레드 라인>에 출연했던 짐 카비젤과 루마니아의 대표 여배우인 마이어 몰렌스턴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낯선 아르메니아어를 배워야 했던 것부터, 짐 카비젤의 경우 혹독한 신체적인 고통까지 수반하는 연기를 하는 도중 어깨뼈가 탈골되는 등, 두 배우에게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 사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종교영화로는 드물게 R등급을 받은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의 충격적인 폭력신들 때문이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채찍질이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여정은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할 만큼 충분히 잔인하게 그려져 있다. 관객에게 충격을 가함으로써 예수의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싶었다는 멜 깁슨의 의도는 분명 그 충격 효과면에서 100% 성공한 듯싶다.

‘반유대주의’ 논란 어디까지 퍼질까

예수의 분장을 지우고 단정한 구릿빛 얼굴로 기자들을 만난 카비젤은 예수 역이 정신적으로 도전적인 역할이었지만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영화촬영의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밝힌 카비젤은 종교인으로서 오랜 세월 익숙하게 접해온 예수 역을 연기하는 데 특별한 개인적인 입장은 없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야구선수 역이든, 예수 역이든 배우로서 그저 연기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다소 민감하게 대답해 인터뷰장을 잠시 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이어 몰겐스턴은 카비젤이 떠난 인터뷰장을 예의 온화한 마리아의 미소로 채웠다. 그는 멜 깁슨의 영화가 반유대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멜 깁슨에 대한 비판은 사실도 아니고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영화가 제시하는 많은 메시지 중에서 특히 “대중이 어떻게 쉽사리 선동되는가라는 교훈에 초점을 맞춰볼 수도 있고, 그러한 불신과 선동의 결과로 인류가 지금까지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을 계속해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기자들에게 되돌렸다.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미국 전역 2천여 극장에서 상영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멜 깁슨의 소망을 채워주지는 못할 듯싶다. <폭스 뉴스>에 따르면, 멜 깁슨의 아이콘 프로덕션과 뉴 마켓 필름이 선정한 개봉관은 논쟁에 참여할 만한 ‘중산층, 유대인, 자유주의자’ 거주지를 피해 대도시의 흑인과 빈민층 지역에 특히 밀집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해외 기자시사회에 초청된 기자진이 보통의 경우와는 다르게, 기독교권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필리핀과 함께 유일하게 아시아를 대표한 한국에서 오는 4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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