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Good bye 먼로, Hello 마돈나, <…홍반장>의 엄정화
2004-02-25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정진환

말하자면 그는 마릴린 먼로에게서 좀더 멀리, 마돈나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속도는 느리지만 아주 착실하고 분명하게.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영화에 데뷔하고, 곧이어 1집 앨범 <눈동자>로 가수에 데뷔한 1993년께, 엄정화는 ‘마릴린 먼로’처럼 ‘군인아저씨’들이 특히 열광하는 섹스 심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약하고 자기 파괴적이어서 그냥 파멸해버린 먼로가 아니었다. 그뒤 10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와 <싱글즈>의 동미가 되어 성적 욕망의 당당한 주체이자 연대하는 여성성의 화신으로 나타났다. 그 사이 <배반의 장미> <초대> <페스티벌> <포이즌> <몰라>를 거쳐 섹시한 댄스가수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긴 했지만 마돈나처럼 성혁명자이지는 못했고, 더구나 시대를 가르는 독립된 코드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그였으니 이건 놀라운 변신처럼 보였다.

그가 시인이기도 한 유하 감독과 10년의 시차를 두고 두편의 영화를 만든 건 의미심장하다(엄정화 스스로 이를 하나의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전기작가 앤드루 모튼은 마돈나의 창조적 성공이 아방가르드를 일반 대중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는 재능 덕분이었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마돈나에게 한 개인으로서, 떠오르는 예술가로서 자각을 갖게 해준 게 뉴욕의 아방가르드 미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와의 만남과 연애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일찍, 연예계에 발을 내딛자마자. 엄정화가 유하 감독을 만난 건 행운이었지만 그보다는 시간의 두터운 켜를 거친 스스로의 자각으로 질적 도약을 이뤘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5집과 6집 사이, 그러니까 2000년쯤이다. “가수의 전성기였죠. 최고로 바빴던 시기…. 이때를 지나면서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마음이 안정되며 편안해졌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그 좋아하는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우울했지만 이때부터는 술을 마시면 즐거워졌어요. 자신감이 생긴 거죠. 사람을 만나도 나를 뒤로 돌려 한 발짝 물러나 보면서 다른 면을 찾아보는 편인데,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됐어요. 캐릭터가 예뻐 보이지 않아도 매력이 있으면 하고 싶어지는 거죠.”

<결혼은,…>에 이어 하필 <싱글즈>를 선택한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3월12일 개봉)에서 보여주는 혜진도 비슷한 맥락의 선택이다. 부잣집 딸에다 의사이긴 해도 그는 얼빵해 보일 만큼 정의롭고 고집불통이며 순수하다. 아버지에게 그동안 받은 돈을 갚기 위해 대학 때 집을 박차고 나간 그가 상류층 의사들의 세계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비록 홍 반장(김주혁)의 지원사격이 없으면 곤란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사고뭉치여서 연희나 동미보다 한발짝 물러난 듯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그는 동장도, 통장도 아닌 반백수의 반장을 인생의 반려자로 고르는 눈을 가졌다. 차기작으로 선택한 <소년 천국에 가다>(가제)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굉장히 엉뚱하면서 진실한 여자예요. 상처를 많이 받은 여자이긴 하지만요.”

한 가지 더 주목할 ‘사건’이 있다. 그는 <…홍반장>의 개봉을 앞두고 8집 앨범 발매로 2년4개월 만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음반 제목이 ‘셀프 컨트롤’이다. 시디를 걸면 그는 당장에 “에브리싱 이즈 체인지드”(Everything is changed)라고 도전적으로, 뇌쇄적으로 되뇐다. 일렉트로니카의 강렬한 비트에 실려오는 ‘모든 게 변했어’란 문구가 과연 우연이었을까? 새 앨범에는 달파란, 롤러코스터의 지누 등이 참여했다. 앨범 전체에서의 비중은 작지만 달파란을 파트너로 끌어들인 건 영화쪽에서 유하와의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지누는 예전부터 좀 알았지만 달파란씨는 전혀 몰랐어요. 일렉트로니카를 예전부터 하고 싶었으나 망설이다가 지금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과감히 해야 할 때다 싶어서 여러 음악가에게 곡을 부탁했으나 음악 색깔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달파란씨를 찾아다녔어요. 강남 모처에서 일본 뮤지션하고 함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생뚱맞은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렇게 3번 정도 찾아가서 함께 작업할 수 있었어요.”

그가 자신감을 갖고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한 지 4년이 흘렀을 뿐이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가 또 뭘 보여줄지 알 수 없으나 배우나 가수로서가 아니더라도 그는 인생의 좋은 역할 모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야무진 여성으로서 말이다. 엄정화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이자 그의 인생 모델이 누구냐고? 마돈나였다.

내 인생의 영화

데뷔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유하 감독이 연기는 전혀 몰랐고 음반 준비나 하던 나를 선택했어요. 흥행은 안 됐으나 엄정화 개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음반과 함께 영화를 시작했고 이후 연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니까요. 양다리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할까. 8년이 지난 뒤 유하 감독이 두 번째 시나리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줬을 때의 감격은 엄청난 거였어요. 내가 그려왔던 모습을 실현해줄 계기를 또 한번 줬으니까. (노출 등) 영화가 굉장히 셌지만 작품성이나 유하 감독의 인간성이 믿음을 줬어요. <마누라 죽이기>에도 출연하긴 했으나 뭔가에 떠밀리듯 선택한 것이어서 나 자신이 만족을 못했어요. 실은 그 작품 아직도 못 보고 있어요. 시사회 때 중간에 나와버렸는데 그때 친구에게 “이 담에 시사회에 올 때는 너한테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물론 강우석 감독님은 지금도 잊지 않고 절 좋아해주세요. 다만, 그 역할을 잘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던 거죠.

내 인생의 음악

음악은 아주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러웠어요. 6살 때 돌아가신 아빠가 음악 선생님을 겸한 교사셨는데 트럼펫 연주를 아주 잘하셨데요. 서라벌예대를 나오셨거든요. 기억이 별로 없는 아빠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일찌감치 음악을 좋아하게 됐어요. 음악으로 아빠에게 가까이 가는 느낌이랄까.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줬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도 강했고. 엄마 통해서 가곡 스타일의 노래를 많이 배웠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합창반을 했는데 대회에서 지면 잠을 못 잤어요. 슬퍼서. 음악과 연기를 함께하는 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이고 그걸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건 아빠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내 인생의 술

아~,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죠. 사실 굉장히 일찍 마셨어요. 고1 겨울방학 때였어요. 사춘기로 예민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고뇌가 아주 컸을 때예요. 불행하다는 생각에. 엄마 혼자 4남매를 키우셨는데 어머니가 사회성이 강한 것도 아니고 굉장히 곧은 성격이어서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피아노도 배우고 예고를 가고 싶기도 했으나 시골이어서 못하는 게 많았지요.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문득 괴로웠고 그러다 엄마랑 좀 다퉜어요. 그때 가슴이 아프다는 걸 처음 경험했어요. 명치 끝이 너무나 아팠으니까. 어머니가 하시던 식당에서 소주를 훔쳐다가 반병 정도 마시고 기절했어요. 지금은 술 세요.

내 인생의 친구

여러 명의 친구가 있어도 특히 집착하는 한 친구가 있어요. 오늘도 의상을 봐준 스타일리스트 박유라(마침 이 친구는 먼저 자리를 뜬 뒤였다). 서울에 올라온 20살 때 만났지요.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먼저 연락해서 만나고 싶어지는 친구였어요. 일 시작하고나서 그 친구가 운전도 해주고 스케줄 정리도 해주고 의상까지 해줬어요. 그러다가 의상 관련 학교도 갔고, 그렇게 지내온 게 10년이 훨씬 넘었네요. 이제는 친구라기보다 자매 같은 느낌이에요. 제가 아픈 것, 힘든 걸 눈빛만 봐도 잘 아는 사이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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