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승 감독을 한지승 대표라고 부르는 일은 왠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벌써 두편의 영화를 만든 제작자이지만, 내일 당장 그가 현장으로 뛰쳐나가 ‘레디 액션’을 부른다 해도, ‘컴백’ 운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더 많이 더 폭넓게 만들고 싶었다”는 그에게 제작은 연출의 연장인 까닭이다. <고스트 맘마> <찜> <하루> 등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와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어온 한지승 감독이 돌연 제작자로 변신한 것은 지난 2001년의 일이다. 그는 영화기자 출신 안영준씨와 영화사 ‘시선’을 설립해, 좋은 영화사와 <재밌는 영화>를 공동 제작했고, 최근 두 번째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를 내놓았다. 여자 사기꾼과 피해 남성, 그리고 그 가족의 엉뚱한 만남을 그린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오랜만에 만나는 튼실하고 유쾌한 코믹멜로다. 그간 로맨틱코미디와 멜로에 각별한 애정과 소신을 보였던 한지승 감독의 향취가 느껴지는 작품. 감성과 취향이 ‘닮은꼴’인 신예 배형준 감독에 대한 믿음, 고무적인 시사회 반응 때문인지 한지승 감독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의 재미가 많은 영화다.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오는 일이 관건인 듯 보인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선입견적 단점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와서 봤을 때 영화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입소문에 기대보려 하고 있다. 일반 남녀의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와는 변별력이 있어야 흡인력이 있을 것 같아, 여자 사기꾼이라는 캐릭터, 가족애, 시골적 정서를 포진시켜봤다. 홍보나 마케팅 면에서 부각시킬 ‘꺼리’도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과 다른 임팩트를 주고자 했다.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하게 됐나.
영진위 시나리오 당선작 <비둘기 둥지 위로 날아든 뻐꾸기>를 읽게 됐다. 기획의 발생 자체가 ‘우연한 발견’에 의한 것이라 분석이나 의도가 많이 개입되진 않았다. 다만 만들고 나서 승부해봄직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수는 있다. 다들 힘들어하고, 그래서 각박하고 건조해지는 지금, 정이 있고 따뜻하고, 세상 살아볼 만하다는 메시지를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사회 반응을 보면서 점점 그런 확신을 갖게 된다.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도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그런 세상이 있다면 이런 세상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 영화가 그런 균형을 맞춰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걸로 본다.
연출한 배형준 감독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고 이 영화를 맡기게 됐나.
배형준 감독에게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게 있었다. 내가 조감독 하던 시절 세컨드로 만났으니까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는다. 신인감독과 신생 영화사에서 도전해볼 만한 규모와 소재인데다 배형준 감독의 감성과 취향에 잘 맞는 영화라는 판단이 들었다. 영화 시작하던 무렵에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친해진 사람이라 믿음이 있었다.
작품의 장르와 분위기상 한지승 감독이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작품에 개입하지 않긴 힘들다. 또 배형준 감독이 내 조감독 출신이라는 정보 때문에 더 그렇게 말들을 하는 것 같다. 10년 넘게 한솥밥 먹은 사람인지라 정서가 닮았을 수도 있을 거다. 고추총각 선발대회나 마을 잔치처럼 소소하게 큰 촬영이 많다보니 정해진 스케줄상 카메라를 서너대씩 돌려야 하는 상황도 생기고, 인력이 부족해서 도운 일은 있다. 데뷔작 연출이라 감독이 심리적으로 불안해할 때 연기자와의 소통문제나 현장 통솔에 대한 조언을 주기도 했다.
최근 로맨틱코미디와 멜로가 부진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등장이 반갑게 느껴진다. 그간 이 장르가 관객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로맨틱코미디는 신생 영화사나 신인감독이 접근하기 편한 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시행착오의 가능성도 높다는 뜻이다. 사실 내공과 품격이 필요한 장르인데 그렇지 못한 면이 보여져 관객에게 실망을 주고 그것이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굳어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터지는 영화들을 보면, 무겁고 자극적인 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반면,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는 ‘밋밋하다’는 미명하에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또 하나, 할리우드에서 가족영화가 잘되는 건 GNP가 2만달러가 넘기 때문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관객에게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배우들이 이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도 위축의 요인이라고 본다.
제작하는 입장에서의 변화라는 건 있다. 감독은 작품을 만들고, 제작자는 상품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 간극을 객관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더라. 아직도 정리가 안 됐고 그래서 혼란스럽다. 제작을 두편 했으니, 이제 연출에 치중할 생각이다. 결혼해서 변한 건 별로 없다. 가정에 대한 고민은 전보다 많이 하게 되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이번 영화음악을 아내 노영심씨가 했다. 작업 파트너로서도 호흡이 잘 맞았나.
<고스트 맘마> 때 영화음악을 의뢰했다가 ‘퇴짜’ 맞은 이래, 같이 작업한 건 처음이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과 일하면 안 되겠더라. (웃음) 많이 싸웠다. 이렇게 말하면 팔불출 같지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신경 많이 써줬고, 음악적 아이디어도 많이 내줬다. 싼 가격에 (웃음) 좋은 세션과 작업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직접 제작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인가.
제작은 연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영화에 들어가는 과정은 같으니까. 그런 교만한 생각이 있었다. 또 하나는 영화를 많이 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내가 직접 연출하는 건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까, 좋은 인력을 동원해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유아적인 생각. 그런데 제작은 또 다른 세계더라. 연출 경험도 많지 않은데, 전혀 다른 세계를 헤집기 시작하니까 갈피가 안 잡혔다. 제작자가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고, 노하우와 공력도 필요한 거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연출에 좀더 집중하려 한다. 기회가 된다면, 지난 3년간의 경험을 접목해 좋은 시스템과 방법론을 개발하고도 싶다.
안영준 공동대표와는 어떻게 의기투합했나. 거쳐온 필드가 달라서 역할 분담도 확실할 것 같다.
기자와 감독으로 만나 친해졌는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시나리오를 보여줄 때만 해도 꼬시는 건 줄 몰랐다. (웃음) 영화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우석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둘이 하면 순발력이나 추진력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그래서 재밌는 영화,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손잡게 됐다. 역할 분담은 특별히 하지 않는다. 여러 부분 같이 상의하면서 결론을 도출하는 편이다. 서로의 장점을 잘 아니까.
강우석 감독이 빨리 연출하라고 채근한다는 말을 들었다. 연출 계획은 어떻게 잡고 있나.
그동안 조감독 데뷔시킨다는 핑계가 있었는데, 이젠 도망갈 데가 없다. (웃음) 사실 부지런히 많이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다. 지금 생각 중인 아이템이 몇개 있는데, 뭐가 먼저일지 알 수 없다. 제작하면서 얻은 판단 기준에 ‘외부적 잣대’라는 게 추가돼서, ‘어떤 게 맞을까’를 고민 중이다. 분명한 건 감성에 기초한 영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를 지향한다는 거다. 어떤 장르가 됐든 나는 쿨하고 건조한 영화는 못 만들 사람이다. 애초 특정 장르에 국한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익숙한 장르, 트루기, 코드에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
가장 최근에 연출한 <하루>에 대해선 어떻게 자평하는가. <하루>의 부진이 제작자로의 변신과 관계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루>가 흥행에서 부진했던 건 아니다.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품이었고, 영화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계기였다. 작품 자체가 갖고 있던 의미가 왜곡된 부분에 대해선 아쉬움이 있다. 어떤 평에 ‘울려서 돈 벌려고 한다’고 했는데, 그럴 거였으면 애 갖고 울리진 않았다. 내 영화적 화두가 ‘가족’과 ‘사랑’인데, 그걸 표현하기에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던 거다.
최근 본 영화 중에 감독 한지승을 자극하고 고무시킨 작품이 있었는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겠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웃음) <러브 액츄얼리>를 좋게 봤다. 시나리오와 감성의 내공이 놀랍더라. 그런 장르를 할 거면, 그 수준까지 올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실미도>도 데뷔 초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소재다. <더 락> <실미도>처럼 무겁고 진하게 가는 영화들을 좋아하고, 또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