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해석하는 두 가지 키워드
2004-02-26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1. 망설임, 환상적인

감독인 소피아 코폴라는 <인디와이어>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몇 장면들을 가벼운 영화 카메라로 조명을 하지 않은 채 다큐멘터리처럼 찍었다고 말한다. <인디와이어>가 그럼 왜 디지털카메라를 쓰지 그랬느냐고 하자, 소피아 코폴라는 이 영화가 ‘사랑과 기억’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대답이다. 이유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랑과 기억에 못 미치는 경험의 생성, 그 과정을 영화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체험을 한계, 그 정점까지 끌어올리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이라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정서의 영역을 미묘하게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말, 억양, 몸짓,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호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갈 때, 어떠한 의미의 상실도 없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순간 중의 하나는 사랑을 시작했으면 하는 때다. 섹스는 아직 수평선 너머에 있고 혹은 불가능해 보이며 그래서 섹스를 제외한 온갖 기호를 통해 둘 사이의 친밀성을 만들어야 할 시점 말이다. 그러나 친밀함의 기호는 그 둘 사이를 횡단하며 늘 몇 부분을 잃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부풀어오른다. 번역과 통역이 겪는 운명이다. 번역은 늘 배신하고 변절하지만 소통의 기대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연인과 같다.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나로부터 타자로 혹은 그 역으로 여행하면서 번역은 원래의 의미를 지워낸다. 동시에 때론 오해를 통한 창조적 이해를 가져온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렇게 간절히 말한다. “번역은 원전의 의미를 따라가는 대신 그 원전이 의미화되는 양식을 사랑스럽고 구체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이 영화는 여러 층위에 걸친 이 번역의 이야기다. 그리고 대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배우로 등장하는 밥 해리스(빌 머레이)의 자근자근한 농담은 중요한 증후적 말실수처럼 행위로 번역되지 못하는 진담을 전한다. 우리에게 <고스트 버스터즈>로 알려진 빌 머레이는 적재적소에 농담을 던짐으로써 근사한 중년의 남자가 된다. 밥이 샬롯에게 “이 호텔이 감방처럼 지겨우니 함께 도망갈까”라고 하자 그녀가 “짐 챙겨올 테니 기다려”로 응답하는 대사는 이 영화가 현재의 결말 대신 거둘 수 있는 다른 결말을 슬쩍 내비친다. 이렇게 농담과 진의, 영어와 일본어, 중년 남성과 20대 여자의 언어, 부부의 언어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라는 다른 시간대와 공간 등이 배려로 차 있거나 혹은 속빈 의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교통한다. 특히 주인공 둘이 일본이라는 공간으로 여행하면서 일어난 공간적 치환은, 시간적 지체, 시차(jet-lag)와 함께 중년과 20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친밀과 사랑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기호의 교환에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일주일간의 밤은 불면과 둘만의 외출로 채워지고 침대 위에서의 긴 대화로 이어진다.

영어 원제로 하자면 <번역 속에 사라지다>(Lost In Translation)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번역 그리고 소통 속에서 사라진 것의 내용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원전, 원래의 의미에 대한 강박에서 나오는 번역문, 번역자에게 충실함을 따져 묻는 태도는 처음 조금 등장하다가 사라지며, 또 번역자도 원전에 대한 정절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그러한데, 우선 도쿄에 와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찍는 배우 밥 해리스는 촬영장에서 감독의 말을 자신에게 통역해주는 여자 통역사가 심각한 오역을 하는 것을 금방 알아채지만 수수하게 받아들인다. 한술 더 뜨는 것은 통역사다. 밥 해리스의 “그 말뿐이요?”라는 문제제기에 당당하게 그렇다고 맞선다. 두 문화 사이, 두 언어 사이에서 벌어지는 ‘번역 속에서 사라진’ 것은 농담 속에서 약간 날을 세운 채 남아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사라진 것을 굳이 복원시키지 않는다.

원전에 대한 번역의 정절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 것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밥과 살롯은 결혼 상태다. 밥과 아내 사이는 중년의 많은 부부들이 그렇듯 가정을 공동으로 경영하는 정도의 관계다. 서재의 카펫 색깔을 함께 결정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샬롯은 갓 결혼한 남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밥은 호텔 재즈 바의 가수와 원 나잇 스탠드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 된 샬롯은 놀라긴 하지만 둘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파기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끝 시퀀스, 밥이 샬롯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관객에게 전달(통역)되지 않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영화의 결정적 퍼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관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극장을 떠나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달 속에서 사라진 의미를 향수하게 하는 것, 그 사라진 것을 궁금해하는 것. 영화는 그것들을 자신의 핵심 과제로 삼기보다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 의미들을 매 순간 잠시 포착할 뿐이다. 영화는 줄곧 현재형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의 진술과는 달리 사랑과 기억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미처 사랑과 기억이 가지고 있는 통상적 의미를 꽉 채우지 못하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사라지는 것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더 많은 화소들로 프레임을 꽉 채우는 것이 목표인 디지털이라는 매체보다 작고 거친 알갱이들로 이루어진 광 감도가 높은 (ASA) 필름을 선택한 것은 다행이다. 경계에 놓여 있는 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들이 필름의 입자 속에 숨쉬듯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샬롯과 밥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 감정과 입자들과 좋은 짝을 이룬다.

2. 어딘가? - 비장소

샬롯이 도쿄 시내에서 넋을 잃고 보게 되는 거대한 전광판 위로 느리게 지나가는 공룡의 환상적 이미지에서 처음 얼핏 느껴지는 것처럼, 영화는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샬롯과 밥이 잠시 머무는 도쿄를 SF 공간처럼 그려낸다. 전광판과 호텔, 가라오케, 밥의 이미지가 담긴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싣고 달리는 버스들은 도쿄를 거주지가 아닌 통과(passage)의 공간으로 감지하게 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번역, 통역의 문제만큼 의미있는 것이 공간의 문제다. 도쿄는 여기서 인류학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기하학적 공간에 가깝다. 그리고 초근대의 공간처럼 보인다. 빈번한 항공 여행으로 축소된 지구의 한곳과 다른 곳의 거리. 미국에서 도쿄로 날아든 사람들은 시차로 불면을 보내지만, 호텔이라는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공간에서 소살리토 그룹의 재즈 공연을 듣고,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을 타며, 팩스를 받고 전화를 한다.

샬롯이 교토를 방문할 때 영화는 교토의 이국적인 정취와 제의를 오리엔탈화하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도쿄의 도시 정경 묘사는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기묘하게 벗어나 있다. 서양이 구축한 “기호의 제국” 일본과 유사한 식의 접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두명의 미국인이 도쿄에 와 겪는 문화적 차이를 낭만화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일본 내의 “미국’과 접촉한다. 예컨대 샬롯과 밥은 손님이 직접 재료를 넣고 끓여먹어야 하는 일본식 전골요리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도쿄가 지루하다고 말한다. 또 그들의 일본인 친구들은 찰리 브라운 등과 같은 노골적인 미국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파크 하이야트 호텔은 글로벌 체인이다. 밥이 머무르는 7일간, 샬롯과 밥은 도쿄에 있으면서도 사실 도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도쿄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비장소”다.

비장소는 인류학자인 마르크 오제가 제안한 용어로 이제까지 인류학적 장소들이 언어, 지역성, 삶의 방식 등에서 비롯되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면 비장소들은 여행객이나 손님과 같은 일시적 정체성과 관계된다. 대표적 비장소들이 통과 공간들이다. 즉, 임시 주거지(호텔, 모텔 등), 기차역, 망명 캠프, 공항 등이 그 예다. 마르크 오제는 현대를 슈퍼 모던, 초근대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바로 이 초근대가 비장소를 생산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흘러가는 비장소적 세계가 초근대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만이 아니라 60년대와 70년대의 모더니스트 영화 이후 세계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비장소들에 대한 무한한 매혹과 집착이다. 아르메니아인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산민 감독 아톰 에고이얀의 <스피킹 파츠>(speaking parts)와 <조정자>(The Adjuster)는 영화의 주요 공간이 호텔과 모텔이다. 차이밍량의 <거기 지금 몇시인가?>의 주무대 중 하나도 파리의 호텔이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의 청킹펜션 역시 임시 거주지다. 슈퍼 모던의 시대, 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난 이산민이고 여행객이며 이주민인 시대적 감수성과 삶의 스타일을 표현해내는 공간으로 호텔과 모텔 그리고 펜션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파크 하이야트 호텔은 밥의 표현대로 감옥이기도 하지만 또 불면의 밤, 두 남녀의 즉흥적 접촉을 가능케 하는 재즈 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톰 에고이얀과 차이밍량의 생존과 존재를 위협하는 고독한 임시거주 공간의 상징으로서의 호텔과는 달리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호텔은 고만고만한 외로움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밥은 포르셰를 사야 하나를 망설이는, 광고 촬영 한번에 200만달러를 받는 고소득자이며, 샬롯의 남편 역시 최상급 대우를 받는 광고 사진 작가다. 그들은 자본과 초근대의 징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멜랑콜리는 감상적이며 영화도 종국에 가선 그러하다. 재능있고 부유한 여성작가가 만들 수 있는 슈퍼 모던판, 권태로울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관한 영화다. 어딘가로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객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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