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녀에요.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알지 못해요.” 남부군 병사 인만(주드 로)이 왜 목숨을 건 탈영을 감행하면서까지 에이다(니콜 키드먼)에게로의 먼 길을 택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다. 그가 가진 건 빛바랜 사진 한 장뿐이며, 에이다와의 추억은 짧은 입맞춤이 전부다. 맹인 할아버지가 10분간의 광명은 10분 뒤에 찾아올 암흑의 공포 때문에 결코 바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인만은 “제 생각과 다르군요”라고 말한다. 그에게 여인은 사랑이 아니라 희망의 이름이다. 그 희망은 10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가냘프고 왜소하다.
미국 남북 전쟁에 내던져진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찰스 프레지어의 소설을 153분 길이의 영화로 옮겨낸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에서 전쟁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라 부서질 듯 허약한 희망이다. 짧고 무서운 전투와 길고 고통스런 탈영-귀향의 여정에 나선 남자에게나, 홀로 남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들어가는 여인에게나, 그리움은 너무 강렬해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 외엔 죽음 같은 시간을 견뎌낼 길이 없는 주문 같은 것이다. 병든 고양이처럼 앙상한 몰골로 마침내 돌아온 인만이 당신을 기억하며 견뎠노라고 말하자 에이다가 상기된 어조로 묻는다. “짧은 순간이었잖아요. 우리는 서로 잘 몰랐고요.” 인만이 대답한다. “지어낸 기억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당신 목의 선은 진짜였고, 당신을 안을 때 내 손에 전해진 느낌도 진짜였으니까요.”
다소 심심한 연애담일수도,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을 장면들
오스카 맞춤형으로 불리는 화려한 제작 출연진에도 불구하고 <콜드 마운틴>은 검소하며 내성적인 전쟁 로맨스다. <콜드 마운틴>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전쟁의 참화나 사랑의 위대함이 아니라, 암흑의 시간을 견뎌내는 자의 굶주림과 속울음이다. 영화에 묘사되는 전투는 단 한번 뿐이며 그 전투가 남긴 목의 상처로 인만은 더 이상 소리치지 못한다. <콜드 마운틴>에는 절규나 통곡 대신 속울음만이 차가운 숲을 맴돌고 깊은 강처럼 흐른다. 르네 젤위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같은 탁월한 조연이 걸죽한 입담으로 종종 활력을 불어넣지만, 인물을 압도하는 풍경은 대개 무심하고 준엄하며 영화는 과묵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국전쟁에 이념이 없듯이, <콜드 마운틴>의 미국 남북전쟁에는 흑인이 없다. 전쟁은 주인공들의 내면과 무관한 외적인 재난이며, 역사적 시간은 오직 악몽이다. <씨네21>과 <필름2.0> 온라인사이트에 실린 네티즌 김태규씨의 적절한 지적대로 <콜드 마운틴>은 인종과 계급문제를 배제하면서 남북전쟁이 갈라놓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떠남-전장-파괴-남성/남음-자연-생명-여성이라는, <오딧세이> 이래 패턴화한 남성-가장 귀환담의 전통적 대립구도로 요약한다. 여기엔 어쩔 수 없는 백인 중심주의가 스며있다.
또한 <콜드 마운틴>은 두 스타가 지닌 육체의 매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갑자기 수다를 떨기도 한다. 마침내 해후한 두 남녀의 매끈하고 에로틱한 정사장면은 영화의 과묵하고 검소한 톤을 깨는 불협화음이다. 인만과 에이다의 육체적 접촉에 관한 한 영화는 원작을 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콜드 마운틴>은 덜 다듬어지거나 다소 심심한 연애담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몇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엔 잊혀지지 않을 장면들이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 여자가 총부리를 들이대며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칠 때, 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남자는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그들은 모두 변해버렸으며, 남자는 막상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 앞에 서자 억눌렀던 두려움이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다.(나중에 인만은 “당신이 나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한다. 살육의 시간을 살아서 통과한 자는 결코 이전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을 가로막은 시간의 무게를, 그리고 그 시간이 남긴 상처의 깊이를 이 한 장면보다 더 잘 드러내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8300만 달러를 들인 할리우드 대작답게, 주인공을 죽음으로써 징벌하고, 따뜻한 후일담을 덧붙이는 친절을 결국 포기하지 못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