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은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다. 진짜 머리 색깔을 묻는 질문에 “그건 미스터리예요. 솔직히 저도 모르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엘리자베스>에서 그녀는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의 여왕이고, <에어 콘트롤>에서는 남부 사투리를 거나하게 퍼붓는 주부이며, <반지의 제왕>의 요정이기도 하고, <밴디츠>에서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은행 강도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올 두 영화 <실종>과 <베로니카 게린>에서는 딸의 남치범들을 쫓는 서부의 억척어머니인 동시에 아일랜드의 마약 카르텔을 파헤치기 위해 목숨을 건 아이리시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반복되는 캐릭터를 선택해온 적이 없다. 모험 같은 인물의 포트레이트에 과감하게 달려들어, 완벽하게 인물을 그려내고 살아 숨쉬는 생명을 안긴다. 머리 색깔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악센트에 대해 “연습하면 할수록 혀의 근육이 연마되지요. 배우로 일한다는 건 지성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두 가지를 아우르는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그녀지만, 완벽하게 악센트를 체득하여 별 힘든 일도 아닌 듯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벌이는 스크린 위의 서커스는 언제 봐도 즐겁다.
그녀가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마틴 스코시즈의 <애비에이터>이다. ‘하워드 휴스’에 대한 이 야심만만한 영화에서 그녀의 역할은 놀랍게도 ‘캐서린 헵번’이다. “전 지금 캐서린 헵번이라는 한 시대의 아이콘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중이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도 당연하죠”라고 두려운 기색도 없이 이야기하는 케이트 블란쳇.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할리우드의 아이콘을 연기할 수 있는 강심장은 그녀의 ‘어머니’로서의 강한 역할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자식에게 가해지는 위협 속에서도 펜을 꺾지 않고 진실을 향해 싸워나갔던 ‘베로니카 게린’과 납치된 어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실종>의 매기처럼 케이트 블란쳇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해내는 강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위해 좀 쉴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제 삶과 건강을 위해서요. 그러나 저에게 부유하고 즐거운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갈 때 배우로서 많은 것들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최근의 케이트 블란쳇은 그 다채로운 다작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해왔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악센트를 과시하며, 진지한 사명감으로 선택하고 창조해낸 역할들도 흥미롭지만 여유를 부릴 때도 된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하면 너무 조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서 지나치게 많은 갈림길을 동시에 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깨의 부담감과 넘치는 카리스마를 조금은 숨기고, 예의 그 약간은 건조하고 약간은 경박한 듯한 말투와 미소를 배시시 흘리는 여유로운 캐릭터를 맡을 때도 되었다고 팬들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캐서린 헵번’과 같은 시대의 아이콘을 마치 마술처럼 스크린 위에 살려낼 그녀의 모습도 언제나처럼 흥미롭지만, 속 편안하게 까르르 웃어젖힐 만한 여유로운 영화 한편 정도도 이제는 쉬엄쉬엄 해줬으면 싶다. 지금까지 카멜레온처럼 달려온 행보를 뒤돌아보건대 이제는 그럴 때도 충분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