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말이 없다. 나무를 깎고 다듬고 매만질 때도. 한눈에 차 뒷바퀴에서 자신의 발꿈치까지의 길이를 알아맞힐 때도. 남자는 말이 없다. 손은 화석처럼 굽고 거칠다. 남자는 오래전에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 아이는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아내와도 이혼한 그는 혼자 남았다. 무심히 그릇을 닦고 스스로를 위해 밥을 차리지만, 남자는 말이 없다.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자는 소년원에서 아이들에게 목공 일을 가르친다.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무언가를 훔친 나쁜 아이들이다. 남자는 그들에게 비판도 훈계도 하지 않고 그저 나무 깎는 일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남자 올리비에는 알고 있다. 아이들은 제 어깨죽지로 나무판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한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장 뤽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들>은 관객에게 거대한 의문부호를 마음에 품고 아무런 단서없이 주인공을 따라갈 것을 원하는, 헌신과 사색의 깊이를 요구하는 그런 영화에 속한다. 우리는 올리비에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불안해 하는지, 무엇 때문에 슬픈 것인지, 무엇 때문에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택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영화를 두번 보지 않는다면, 영화의 전반부, 올리비에가 끊임없이 프란시스란 아이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제로 받아들이기로 한 소년 프란시스가 5년 전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제 영화는 복수냐 용서냐 하는 화해할 수 없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쌓은 업보의 늪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한 사나이의 일기나 기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아들>은 관객에게 무심함, 공명정대함, 사색과 거리두기, 추론하기 등의 수많은 우회로를 뻗어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준다. 사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가 어떻게 생긴 아이인지 몹시 궁금해 한다. 거의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죽은 아들이 보고 싶은 만큼, 아들을 죽인 아이가 보고 싶은 남자. 아니 어쩌면 이미 소년원에서 아이들에게 목공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언젠가 ‘그놈’을 만날 것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는 남자. 그 남자의 내면에 대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침묵 사이에 얼핏얼핏 끼어드는 번민에 대해, <아들>의 카메라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올리비에의 뒤통수와 등 뒤에 바싹 갖다대고, 다르덴 형제는 청진기처럼 그의 숨소리를 흡수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다르덴 형제는 전작 <약속>에서부터 <로제타>와 <아들>에 이르기까지, 인물에 동기를 부여하고 행위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영화 만들기와는 멀찍이 떨어져, 자신들만의 영역을 개척해나간 시네아스트들이다. 심지어 그들의 영화에는 음악도 없고 스타도 없고 화려한 세트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친절한 감독이라면 일인칭 내레이션을 썼을 수도 있지만, 내레이션 대신 영화 곳곳에 즐비한 괄호에 관객은 오히려 자신의 지문을 써내려가야 한다. 다르덴 형제는 행동이 숨겨지면 욕망이 거기 존재한다는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행동은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외진 목재소에 아이를 데려간 사내는 아이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다. 예수처럼 목수였던 그는 살인자도 성인도 될 수 있었다. 그 번민과 고뇌의 시간이 켜켜이 나무 지층처럼 남자의 삶에 쌓이는 걸, 다르덴 형제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허리에 차는 두툼한 연장 벨트를 풀고 죄는 순간순간의 몸짓과 반복을 통해 표면으로만 말을 한다. 그래서 <아들>의 진정한 O.S.T는 배우들의 숨소리이며, 발소리이다. <아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올리비에의 뻣뻣한 목이자 부지런히 나무를 재는 손이다.
이렇게 다르덴 형제는 육체라는 말초부위를 통해 고통이라는 중추신경에 다가가려 든다. 그들의 영화에서 육체는 다르덴 형제가 노동자를 정의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인간이란 존재론적인 무게감을 관객에게 깨우쳐주는 또 다른 ‘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로제타>에서 실직과 알코올 중독인 어머니에게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로제타의 삶이, 생리통을 이기려 헤어 드라이어로 마사지하는 로제타의 배를 통해 무심히 드러난다. <아들>에서 프란시스를 도제로 받기로 한 날, 이혼한 아내는 와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올리비에에게 말한다. 이때도 카메라는 빈 도시락을 닦는 올리비에의 손을 말없이 비춘다. 주인공들의 일상을 튼튼히 받쳐주는 묵묵한 종복인 이들 손과 발과 귀와 눈들은 다르덴의 세계에서 언어를 대신하는 순한 도구들이다. 이렇게 육체가 향유하는 촘촘한 일상을 훑어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올리비에가 얼마나 오랫동안 슬픔이란 중력의 나락에 머물러 있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쾌락의 부력을 상실했는지 느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감정을 자극하는 동시에 억압한다. 표면의 내러티브와는 또 다른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결국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다르덴 형제의 명제는 <아들>에서 올리비에가 자신의 육체를 지렛대 혹은 도구로 쓰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줌으로써 더욱 극명해진다. 프란시스에게 처음으로 나무를 드는 법을 가르치던 날, 소년은 중심을 잃고 마룻바닥에 나뒹굴어버린다. 육체에 대한 균형감각이 없으면, 중심을 잃고 쓰러지게 마련이다. 그 점은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혼을 이해하는 통로로서의 형식
그러나 다르덴 형제가 브레송을 닮았든 닮지 않았든 그들이 형식을 통해 내용을 완성하는 또 다른 진경의 예술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직한 노동자는 하층계급이 아닌 ‘계급을 떠난 사람’(declassed people)이 된다고 믿는 다르덴 형제는 1970년대 이래 노동자와 연관된 다큐멘터리를 60여편이나 제작했고 이 가운데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클로즈업 핸드헬드를 선택했다. <아들>에서 시종일관 지속되는 오버 더 숄더 숏이나 클로즈업 핸드헬드의 도드라진 형식은 그대로 올리비에의 영혼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는 이제 프란시스란 이해할 수 없는 우주를 맞이하여, 아들의 죽음이라는 기억과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맙소사. 신은 얼마나 잔인한 양반인가. 아들을 목조른 이유를 물어보자 아이는 차 뒤에서 자도 되겠느냐고 물어보고, 그런 아이를 억지로 깨워서 추궁하자, ‘안 그러려고 했는데 무서워서 그랬노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아이가 그저 아이임을 밝혀질 때,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하필 ‘아들’이었겠는가. 프란시스를 바라볼 때도 아내를 바라볼 때도, 늘 화면에 걸쳐진 올리비에의 등과 목은, 우리에게 프란시스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떨칠 수 없게 만든다.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다시 제자리로 오게 되는 아비의 닫힌 마음, 그 휘어져버린 등짝을 이해하겠느냐고.
그리하여 이제는 알겠다. 영화 맨 처음 나왔던 나무 두들기는 소리가 사실은 아비가 자신의 심장에 대 못질하는 소리였다는 것을. 목수이자 예수처럼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남자는 마침내 자신의 차를 고해소로 이용하여 소년에게 죄의 토설을 강권하지만, 막상 목재소에 가서는 자신이 소년에게 고백한다. ‘나는 네가 죽인 아이의 아버지이다.’ 다르덴 형제는 <시네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정말 보여주려했던 것은 용서나 화해가 아니라 폭력의 전달과 아버지가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직업의 있고 없음이 한 인간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과 세대간의 관계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올리비에는 끝내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프란시스도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프란시스가 결국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날 안 죽였구나. 그럴 수도 있었는데. 안 죽였어.’
그러나 다만 그뿐이었을까? 사다리에서 떨어진 소년은 남자와 똑같은 포즈로 손으로 목을 감싸쥐고 아파했다. 남자와 똑같이 허기를 느낀 소년은 똑같은 포즈로 서서 똑같은 애플 파이를 먹었다. 무심하게 잠을 청하는 듯 보이는 소년이지만, 수면제를 먹는다는 소년의 말에서 그가 짊어졌을 불면의 밤을 올리비에도 느꼈을 것이다. <아들>에서 개인적으로 클로즈업 핸드헬드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인물들을 이어주는 팬숏이었다. 다르덴 형제는 이 끊어질 수 없는 유사부자의 인연과 업에 대해서 숏을 나누지 않고, 팬의 형식으로 화답한다. <아들>에서의 팬숏은 마치 <쥴 앤 짐>에서 주인공 세 사람의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을 나타내는 팬숏처럼, 세상과 절연한 채 살아가는 올리비에와 프란시스라는 두 섬을 잇는 가교가 된다. 아마도 프란시스가 물리적 감옥에 갇혀 있던 지난 5년 동안, 올리비에 역시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있었으리라.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이나 인연의 고무줄로 함께 묶여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약속>에서 아프리카 여인과의 연대로 폭압적인 아비의 손을 뿌리치고 나올 수 있었던 주인공 소년처럼,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적이라고 다르덴 형제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순정적 연대기처럼 보이는 브레송보다 다르덴 형제는 멜로드라마와 훨씬 가까운 지점에서 온기있는 손길을 관객에게 내민다. 적어도 현재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의 문을 닫을 수 있다고. 영화를 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속삭임을 믿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