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역사에 기반한 주류영화
오스카 맞춤으로 만들어진 영화 <콜드 마운틴>은 4편의 잠재적 라이벌(<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라스트 사무라이>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그리고 좀 동떨어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과 그다지 전망없어 보이는 동류 <휴먼 스테인>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덩치 큰 전쟁영화이며 섬세한 러브스토리라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 <콜드 마운틴>은 사랑과 전쟁이라는 두 이야기 사이에서 쉽지 않은 전투를 치르고 있다. 찰스 프레이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직접 각색해 만든 이 영화는 (북군의 어이없는 공격 실패로 유명한) 피터즈버그 대공방이 한창이던 1864년 7월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혈낭자한 격전의 와중에서도 주인공 인만(주드 로)은 전장으로 떠나오며 나누었던 뜨거운 키스의 추억을 아로새기며 사랑하는 연인 에이다(니콜 키드먼)의 사진을 들여다보기에 여념이 없다. 이쯤 되면 가히 ‘아메리칸 페이션트’라고 부를 만하지 않을까?
남북전쟁의 동족상잔 상황 자체가 사랑의 감정을 극적으로 부추기기도 하거니와 영화 <콜드 마운틴>은 평행선을 달리던 인만과 에이다의 삶이 어떻게든 다시 합쳐지도록 만드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옥 같이 참혹한 초반부의 전투장면에 이어 인만과 에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3년 전의 순간으로 플래시백되는 영화는 이후 시종일관 두 사람이 애틋하게 마주치는 전쟁 전의 순간들과 전쟁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 두 사람이 각자 겪어야 하는 고통에 찬 나날들을 교차시킨다. 피터즈버그 전투에서 부상당한 인만은 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탈영해나와 콜드 마운틴으로 돌아오기 위한 긴 여정에 나서고, 목사였던 아버지(도널드 서덜런드)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에이다는 대책없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영화 속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자신의 노예들을 풀어준다. 영화 속에서 한 이웃이 말하듯이 “그녀는 이제 빈털터리고 유령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다행히 떠돌이 악사의 딸 루비(르네 젤위거)가 나타나 곤경에 처한 에이다를 돕게 되는데, 그녀는 입에 모터라도 단 듯이 잡다한 생존 철칙을 공격적인 언사로 설파하는 저돌적인 캐릭터이다. <콜드 마운틴>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된 바) 주연보다 돋보이는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르네 젤위거는 그녀 특유의 (찡그리지만 호감가는) 표정과 동작 연기에 더해 이제까지의 본인의 역할 중에서 가장 외향적이고 재치있는 캐릭터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녀는 ‘감각의 기억’(sense memory)이라는 연기의 방법론적 개념을 (혹은 고대 그리스극의 마스크를) 재발명이라도 하듯 시종 입을 앙다문 채 사시 눈을 하고 등장하는데, 아마도 그녀의 연기 전략은 어떤 마스크를 설정한 뒤 그것을 영화 전체를 통해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프레이저의 원작에 비해 밍겔라의 영화는 지역색이 현저히 희석돼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남부 산악 지역의 민요와 방언이 흘러넘침에도 불구하고 니콜 키드먼의 느려터진 남부 사투리와 미국 남부와는 확연히 다른 중부 유럽의 산악 풍경이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일 게다. 에이다의 생존기가 병사의 귀환이라는 대서사와 병치되는 이야기 구조와 함께 영화 <콜드 마운틴>이 루마니아의 오지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묘하게 보편화된 체험을 만들어낸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나 코언 형제의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와 같이 <콜드 마운틴>은 기꺼이 <오디세이>의 플롯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리스 신화 속의 사이렌 요정 같은 여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인만의 우연한 피난처나 신화 속 키르케 요정을 연상시키는 내털리 포트먼의 등장에서 이런 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뉴욕 북 리뷰>에서 앨프리드 카잔은 원작소설을 치켜세우며 인만이라는 캐릭터는 아마도 (무뚝뚝하고 우울하지만 다재다능하고 탁월한 킬러로서의) 젊은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한 가장 완벽한 역할일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주드 로는 냉정한 킬러라기보다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예민한 희생자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연기 방향은 키드먼의 그것과도 일치하는데, 때문인지 시나리오상에서 이 차분한 두 캐릭터가 잉꼬처럼 달콤하게 맺어지도록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교감은 연기보다는 서로 교환한 사진을 통해서 더 크게 발생하는 것 같다. 인만이 교회당에 들어온 비둘기를 달랠 수 있는 인내심과 비겁한 주인 때문에 곤경에 처한 노예 여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용기, 그리고 체로키 인디언 원주민을 위해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섬세함을 갖춘 인물이라면 에이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해나가는 인물이다.
우물에 거꾸로 기대어 비춰본 거울을 통해 에이다는 인만이 돌아오는 예시를 받게 되는데, 이는 적당하게 몽롱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본론이 여행이고 영화의 도식 자체인 만큼 <콜드 마운틴>은 인만이 멈춰 설 때마다 발걸음이 둔해진다. 영화 속의 러브스토리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은 총체인 무질서 속에서 시민들이 그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자경단원들로부터도 고통받던 남북전쟁 직후의 사회상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실로 <콜드 마운틴>의 실패한 로맨스는 고통의 역사에 기반한 주류영화라는 이 영화의 특징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