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사마리아> 정성일 영화평론가
2004-03-09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33절. 강도 당한 자를 제사장도 피해가고 레위인도 피해갔으나,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준 다음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았다. 예수께서 가로되 네 의견에는 이 셋 중 누가 네 이웃이냐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김기덕의 열 번째 영화 〈사마리아〉가 그의 최고걸작은 아니긴 하지만 그의 가장 성숙한 영화일 것이다. 물론 영화적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으며 유치한 형이상학적 대사들이 넘쳐나지만(저 닭살 돋는 대사들이라니!), 김기덕은 자신의 테마를 심사숙고하고 있다. ‘원조교제’를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기덕은 현명하게 성 매매 현장을 찍지 않았으며, 유치하게 십대 소녀의 섹스 장면을 찍는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상 ‘원조교제’는 이 영화에서 다루려는 테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고생 재영과 여진이 성 매매를 하는 이야기는 영화가 시작한 지 절반이 좀 넘으면 곧 자취를 감춘다. 그 다음에는 기괴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바뀐다. 죽은 재영에 대한 죄의식으로 여진은 재영이 만난 남자들을 찾아가서 섹스를 하고 돈을 돌려준다. 그걸 우연히 본 재영의 형사 아버지는 그 뒤를 미행하면서 복수한다. 그리고 난 다음 별다른 사건이 생기지 않는 아버지와 딸의 기나긴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물어본다. 돌로 내리쳐야 할 것인가, 용서해야 할 것인가

‘사마리아’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당신이 성경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수밀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소나타’로 이루어진 세 개의 에피소드는 수상한 제목들이다. 어른들에게 몸을 내맡기면서도 이상한 미소를 잃지 않는 재영은 자신을 선재동자에게 26번째 선지식을 안겨준 바수밀다 여인이라고 불러달라고 여진에게 부탁한다.

그 재영이 죽고 난 다음 남자들에게 돈을 되돌려 주러 다니는 여진의 불가사의한 행위를 요한복음 8장 7절 간음한 여인을 내세워 예수께 모세 법을 내세워 물어본 율법학자들에게 대답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돌로 쳐라”라는 말로 대신한다. 화엄경과 요한복음의 숨바꼭질, 혹은 불교와 기독교의 도착적 용서에의 환상. 그러나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은 위험한 구원이다.

주인공은 아버지다, 무능력한 존재…아버지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이 아니라 여진의 아버지이다. 〈사마리아〉의 온전한 영화제목은 〈사마리아, 나쁜 남자 두 번째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쁜 남자는 재영의 몸을 사고, 여진과 섹스를 한 남자들이 아니다. 김기덕의 질문은 그 아버지에게로 향한 것이다. 이 사악한 세상 속에서 딸을 보호하지 못하고 망가지도록 수수방관하는 (세상의) 아버지(들)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슬픈 음란함은 소녀들의 순결함에 대한 거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거래에 대해서 아버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오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능력한 존재이며, 그것을 깨닫는 데 사실상 영화의 전체가 바쳐진다. 아버지는 등굣길마다 딸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와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딸은 그것을 실천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며, 희생은 대가를 얻지 못한다. 혹은 그 희생적 실천은 아버지의 무능력을 더 잘 드러내려는 것이다. 파국은 벌어진 다음이며, 아버지가 그 실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딸과 함께 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죽은 다음이다. 이 영화의 기적은 여기에 있다. 죽은 어머니를 찾는 여행 속에서 아버지는 딸의 희생을 막는 유일한 길이 자포자기에 가까운 용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이다.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자비로운 아버지에로의 자리 옮김, 혹은 모세의 율법에서 예수의 희생에로의 눈 돌리기. 그것만이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김기덕의) 유일한 선택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윤리적 긴장은 죄의식과 희생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이 천년 전의 딜레마의 반복이다. 당신의 ‘덜 나쁜’ 이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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