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333일이 화창하다는 LA에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며칠 뒤 개막하는 아메리칸필름마켓(AFM)과 일주일 뒤 열릴 제7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위한 손님맞이 대청소라도 하려는 듯. 현지 방송은 아카데미와 막 오른 미국 대선 관련 보도로 연일 들썩거렸고, 도나우거리 포시즌 호텔에는 아라곤 역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비고 모르텐슨의 새 영화 <히달고>(터치스턴픽처스 제작·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 배급)의 월드프리미어에 참석하려는 전세계 취재진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시사회는 지난 2월22일(현지시각) 할리우드 선셋대로에 위치한 하모니 골드 극장에서 저녁 7시에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히달고>는 1890년대 실존인물인 장거리 경주의 전설 프랭크 T. 홉킨스와 그의 조랑말 히달고의 얘기다. 미국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 히달고와 기수인 홉킨스가 아라비아 사막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레이스 ‘불의 대양’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는 실화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액션어드벤처이다. 아라곤의 검고 긴 머리 대신 갈색 단발머리를 한 카우보이 비고 모르텐슨이 넓은 평원에서 말을 타며 달리는 장면으로 대서사는 시작된다. 카우보이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홉킨스는 군집배원 시절에 운디드니의 인디언 학살을 목격한다. 인디언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홉킨스는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무관심으로 인해 빚어진 학살의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고난의 경주에 참가한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죽음의 레이스 ‘불의 대양’(The Ocean of Fre)은 오직 왕족에 의해서 자란 순수혈통의 최고 아라비안 경주마들이 부와 명예를 위해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아라비아 사막 4800㎞를 질주하는 경주이다.
죽음의 레이스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다
이처럼 <히달고>는 할리우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승리의 영웅담이다. 하지만 126일에 걸쳐 아프리카 사막에서 촬영한 광활한 장면은 스펙터클하다. 특히 CG의 힘으로 재탄생된 모래돌풍과 메뚜기떼 습격장면, 표범과의 사투장면은 흥미로운 볼거리다. 감독은 <쥬라기 공원3> <쥬만지> 등을 만든 조 존스턴. 그러나 조 존스턴은 23일(현지시각) 포시즌 호텔 12층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정신적 구원을 찾아 떠난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린 드라마에 충실하기 위해 시각효과를 최소화하고 사실감을 극대화했다”고 말했다. 또 특별히 실화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장르에 상관없이 예전과 똑같은 영화는 싫다. 관객은 새로운 것을 원하고 감독은 그걸 제공할 임무가 있다”며 “진실이 픽션보다 더 재밌으며 장르보다 스토리라인이 더 중요하다”며 이번 작품의 선택 이유를 들었다. 특히 미국에서 건너온 카우보이와 아랍 부족민과의 갈등구도가 아랍권 사람들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여서 특별고문을 두고 스토리 검증을 받았다고 한다.
또 <히달고>는 아랍인들의 모습이 이전의 할리우드에서 비친 과장된 모습에서 탈피,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등으로 한국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오마 샤리프가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와 아랍의 부족장 시크 리야드를 열연했다. 또 홉킨스와 여주인공 자지라(줄레이카 로빈슨)와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지만 할리우드영화의 기본적인 틀과는 다른 부분이어서 상당히 이색적이다. 로맨스가 빠져 아쉽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줄레이카 로빈슨은 “할리우드식 ‘키스’ 종말이 아니라서 더 아름답다”고 대답했다.
<히달고>는 15년의 무명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해준 <반지의 제왕>의 폭발적인 성공으로 비고 모르텐슨에게 첫 단독주연의 기쁨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러나 비고 모르텐슨의 캐스팅에 대해 조 존스턴은 “<반지의 제왕>을 보고 캐스팅한 것은 아니고, <워크 온 더 문>(국내 미개봉)에서 다이앤 레인에게 블라우스 파는 장면을 보고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에 반했다”며 “그 모습에서 이방인의 신비로움과 가냘픔을 읽었다”고 한다. 또 “캐스팅 때부터 <반지의 제왕>의 시너지를 노리지는 않았으나 애초 9월로 잡혀 있던 개봉일정을 아라곤의 캐릭터 변화를 위해 <반지의 제왕> 개봉 이후로 연기했다”고 밝혔다.
역시 제왕은 다르긴 다른가보다. 비고 모르텐슨은 이번 작품에 출연한 오마 샤리프와 여주인공 줄레이카 로빈슨에게 “단점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조 존스턴 감독은 “비고는 ‘무비스타’보다는 ‘아티스트’로 불리기 좋아한다”며 그의 소탈함과 함께 그림, 사진, 시 등에 전문가 수준의 재능을 지닌 색다른 면모도 소개했다. 비고 모르텐슨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동료 배우들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히달고>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많은데 모두 발전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줄레이카 로빈슨은 독립적인 회교 여성인 자지라의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며 그녀의 연기력과 국제적 감각을 격찬했다.
<히달고>는 총 9천만∼1억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됐으며 오는 3월19일 국내 개봉한다.
프랭크 T. 홉킨스 역의 비고 모르텐슨"아라곤과 홉킨스는 닮았다"
짧은 갈색 머리와 체크무늬 셔츠, 바랜 듯한 녹색 재킷을 입고 나타난 비고 모르텐슨은 <히달고> 촬영 기간에 말을 소재로 자신이 찍은 사진집을 담은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빛바랜 옷만큼이나 순박하고 친숙한 모습이었다.
-첫 번째 주연영화로 <히달고>를 선택한 이유는. 현대극도 아니고 <반지의 제왕>과는 달리 실화를 다룬 내용인데.
=아라곤도 히달고와 홉킨스처럼 실제 인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화나 역사에 아라곤 같은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배우가 되기 전부터 신화적 스토리와 고난과 싸우면서, 극한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이야기에 매료돼 있었는데 그 점에선 <히달고>와 <반지의 제왕>이 일맥상통한다.
-사막에서의 촬영이 힘들었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사하라 사막은 색다른 지형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다들 호텔로 돌아갔는데 나는 사막 현장의 트레일러에서 잤다. 모래 폭풍이나 카메라 장비 관리 등 힘든 점도 있었지만, 밤이 돼 모래 먼지가 가라앉은 뒤 깨끗하고 고요한 사막에서 바라본 하늘은 너무 멋진 경험이었다.
-파트너인 히달고와의 호흡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T. J.는 개성있고 똑똑한 말이다. 사막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많은 장비, 그리고 인파 속에서도 온순하게 잘 적응했다. 히달고가 보여주는 의심스런 ‘눈빛’ 연기는 연출이 아니다. 순간순간 잡은 자연스런 표정을 찍은 것이다. T. J.는 시키지 않은 것도 알아서 잘 수행해줬고 그사이 정이 들었다. 현재 캘리포니아 근처에서 같이 살고 있다.
-<반지의 제왕> 이후 생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전보다 바빠졌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말고는 없다.
-오마 샤리프와의 촬영은 어땠는가.
=워낙 큰 배우이고 역사적 인물이라 함께 영화를 찍은 것 자체가 나에겐 교육이 되었다. 시크 리야드 역할이 그 당시 아랍의 족장으로서 딸의 개성을 살려주는 역이라 그가 무척 좋아했다.
시크 리야드 역의 오마 샤리프"‘진짜’ 아랍인 그 자체를 그렸다"
오마 샤리프(72)는 아직도 건재했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날렵한 몸매에 유머감각과 활력이 넘치는 당당한 노신사였다. 한국 기자들과 별도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남한에서 왔냐”고 묻고는 한국 담배 ‘오마 샤리프’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5년 만에 <히달고>로 스크린에 다시 돌아왔는데.
=<히달고>는 어드벤처영화이며 교훈적이다. 특히 할리우드 작품에서는 아랍인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는 ‘진짜’ 아랍인 그 자체를 그대로 묘사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최근 5년여 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것은 시시한 영화의 늙은 아랍인 역만 들어왔었고, 손자들이 “할아버지 영화는 재미없어요”라는 말에 체면이라도 지켜야겠다 싶었다. (웃음)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다. 감회가 남달랐을 텐데.
=<아라비아의 로렌스> 찍을 때에는 집은 한채도 없고 텐트만 있었는데 지금은 할리우드 도시처럼 호텔과 스튜디오가 들어서 있어 같은 장소란 느낌이 전혀 없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을 회상하면.
=내 생애 최고의 인물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때 20개월, <닥터 지바고> 때 10개월간 같이 촬영하며 지냈다. 나를 국제무대에 나오게 해준 사람이다. 그 당시 아랍인이 할리우드에서 스타로 성공하는 건 큰 사건이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나의 스승이자 아버지이며 정신적 지주이다.
-옛날 영화와 요즘 영화의 차이는.
=영화는 그 시대를 대변한다. 예전에는 인정이 넘쳐나 영화도 따뜻했는데, 요즘은 인구도 많고 빈부격차도 커지면서 영화가 점점 폭력적이 되고 있다.
-이집트 출신으로서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아랍이 오랫동안 부족국가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후세인은 제거할 수 있겠지만 아랍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장기적인 교육과 생활고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전과 달라질 수 없다.
-다음 작품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최초의 왕에 관한 전설의 영화 <길가메쉬>에 피터 오툴과 함께 조연을 맡았다. 감독과 주연배우는 누구더라…. 70살 이상 감독 이름은 알지만 그 아래 감독들과 배우들은 잘 모른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