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시리 질문 문항을 준비했다 싶었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세 배우 양택조(65), 선우용녀(59), 박영규(50)씨는 앉자마자 시사회의 관객 반응에서부터 촬영현장에서의 고생, 서로의 연기에 대한 때지난 훈수와 중년부부의 베갯머리 송사까지 메들리로 이어갔다. 선우용녀씨가 촬영 도중 멍게를 먹다가 탈난 에피소드를 말하자 양씨가 “그럴 땐 소주 한잔 마시면 싹 낳는데” 하면서 소주의 효능을 사례 중심으로 설명하면 박씨가 바톤을 이어받아 소주가 해산물 술상계를 평정한 사연을 해설하는 식이었다.
백년묵은 몸부림이야, 셋이 합쳐소풍나온 아이들처럼 두서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들이 조명 앞에 서자 갑자기 오전시간대의 토크쇼에서 다큐멘터리 <한민족 리포트>로 채널이 돌아간 듯, 품위가 ‘확’ 올라온다. 그런데 “좀 밋밋한데요”라는 사진기자의 한마디에 눈깜짝할 새의 간격도 없이 이들의 표정은 시사교양에서 일일 시트콤 모드로 홱 바뀐다. 착 감기는 호흡과 기습적인 반전. 합하면 백년이 넘는 연기경력의 소유자 세 사람은 이렇게 고독이 몸부림치는 코미디 영화 한편을 완성했을 것이다.
<고독>의 내 연기, 내 모습에 대하여양택조“큰 화면으로 보니까 나는 왜 그렇게 못생겼어.본래 바닷가 사람들이 머리숱이 많거든. 근데 우리가 다 훤하니까 나까지 훌러덩하기 그래서 가발까지 쓰니 아주 가관이야. 그래도 영화는 괜찮았어. 연기자가 자기 작품 보면서 만족하기 힘들거든. 마지막 스쿠터 쫓아가는 장면에서 웃겨볼려고 주책떤 게 좀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아마 다시 찍어도 그렇게 갔을 거야. 찬경이 원래 그런 인간이거든.”
선우용녀 “앞에 흰머리 나도 염색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었죠. 근데 늘그막에 이혼하고 시골에 내려온 여자가 무슨 그런 여력이 있겠어. 끼있는 여자도 아니고 말야. 근데 인주가 그냥 얌전한 역이니까 자기 색깔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지 않은 건 좀 아쉬워.”
박영규 “제일 웃길 것 같은 사람이 제일 진지하게 나오잖아요. 관객들이 나한테 가지는 웃음에 대한 기대치를 완전히 배신한 거지. 그러다가 그 눈 깜빡거리는 장면에서 다 뒤집어지잖아요. 가장 진지한 순간에 웃음을 폭발시키는 것, 그게 정말 코미디지. <고독…>이 바로 그런 코미디영화구요.”
양택조“이번 영화 찍으면서 제일 편했던 게 뭐냐면 밥먹는 거였어요. 젊은 친구들하고 영화 찍을 때는 밥먹을 때 같이 모였다가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슬금슬금 피한다구. 먹다보면 늘 혼자야. 그게 고독이지. 근데 뭐 외로운 거 한두번인가. 우리 나이 되면 하도 훈련돼서 아무렇지도 않아.”
박영규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는데 말이죠, 정말 외로운 건 다른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배우 인생에서 주변으로 밀려가는 느낌이 들 때예요. 주인공의 아버지, 삼촌, 이런 역 들어오기 시작하면 배우로 고독해지기 시작해지죠. 내가 아무리 안 밀려간다고 발악해도 시든 꽃은 나도 보기 싫은데 그걸 어쩌겠어”
선우용녀 “요즘 영화홍보 때문에 인터뷰 가면 연기생활 몇년째인지 꼭 물어봐요. 30년, 40년 이런 이야기하다 보면 고독해지지.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건데 문득 세월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고 현실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니까요.”
까불지 마, 인생 깜짝할 새다 잘 나가는 청춘 스타들 니들도 나이들어 봐박영규“요즘 잘 나간다는 젊은 배우들 보면 나는 안쓰러워요. 천년만년 잘 나갈 수도 없고, 그 인생에 얼마나 많은 좌절이 끼어들겠어. 그 고통 깨나가면서 이삼십년 계속해 나가는 게 스타 되는 거보다 더 힘든 거지.”
양택조 “한 이십년 전 일이야. 방송국에서 잘 나간다는 2세 배우가 내 옆에 앉아있는 아버지뻘 되는 선배한테 목에 힘 딱주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가더라구. 그 친구 지나가니까 이 사람이 조용하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까불지 마 이놈아. 인생 깜짝할 새다.”
<고독이 몸부림칠때>는...상처한 배중달(주현)은 딸들 시집보내고 해안가 시골마을에 타조 농장 운영하며 혼자 산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장가 못간 40대 후반의 동생 중범(박영규)과 함께 사는데, 동생 장가보내야 한다는 게 인생의 남은 숙제다. 다혈질인 중달은 틈만나면 동생에게 장가가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이 동생은 장가갈 생각이 없다. 동네에서 횟집하는 이혼녀 순아(진희경)가 여러차례 마음을 전하는데도 중범은 자꾸만 피한다. 중달, 중범 형제의 장가를 둘러싼 갈등과 화해가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중심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곁가지 이야기가 더 풍성한 일종의 앙상블 코미디이다.
이 동네엔 중달의 친구 조진봉(김무생), 홍찬경(양택조), 이필국(송재호)가 함께 산다. 홍찬경을 뺀 둘은 다 부인을 여의었다. 혼자 사는 조진봉은 남의 험담 늘어놓길 좋아하고, 성질도 고약하다. ‘반공 소년 이승복 정신계승 협회 경남지부 이사’ 같은 시시콜콜한 직함을 여러개 가지고 다니는 진봉은 거의 매일같이 배중달과 싸운다. 그때마다 그걸 말리는 게 홍찬경의 몫이다. 중달과 진봉의, 어린아이들 같은 싸움이 두번째쯤 되는 비중으로 자리잡는다. 세번째쯤 되는 이야기는 이혼하고 서울서 내려온 할머니 송인경(선우용녀)의 등장이다. 남자 노인들의 마을에 인경의 등장은 사건이 되고, 진봉이 계속 눈독 들이지만 인경과의 로맨스는 딸과 함께 사는 순한 할아버지 필국의 차지가 된다.
<고독이…>는 노년을 전시하지 않고, 가까운 친구처럼 대하는 따듯한 영화다. 노인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은 얼핏 희화화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품격이 있고 아이러니도 있다. 노년의 ‘고독’은 영화 속 노인들의 ‘몸부림’이 자아내는 웃음 뒤로 숨었다가 가끔씩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 농장을 뛰쳐나온 타조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그 타조의 시선을 빌어 영화속 노인들과 관객을 대등하게 만드는 대목도 우아하다. 다만 영화의 디테일들이 강약없이 같은 톤으로 흘러서 리듬감과 힘이 약해 보이는 건 아쉽다. 출연진의 면모에서 알 수 있듯, 관록있는 원로 배우들의 연기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시종 열변을 토하는 주현의 에너지, 속이 응큼해 보이는 김무생의 능청, 말을 안 해도 그게 연기가 되는 송재호의 인자해 보이는 눈빛 등을 보다보면, 젊은이들 이야기 일색인 우리 영화계가 큰 재산을 허비하고 있는 생각이 새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