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같지 않아서 배우 같은 배우,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주현
2004-03-1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아마도 주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분장실 책상 위에는 촬영 중이거나 촬영에 들어갈 드라마 대본 세편과 검토 중인 시나리오 한편이 놓여 있다. 그는 또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고, 또 다른 영화 <가족>을 찍고 있기도 하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피곤한 얼굴로, “술기운으로 버티는 거지”라며 인터뷰를 시작한 주현. 그러나 그는 미처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연기와 배우와 영화에 대한 40년 공력의 장광설을 풀어놓았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독특한 코미디영화다. 어떻게 연기호흡을 가다듬었는지.

코미디는 마임이다.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내가 결혼식장에서 김무생 뒤통수 때리는 장면, 그때는 웃음이 나올 거라는 게 내 눈에 딱 보이는 거야. 한대 딱 치고 “씨발놈아” 그러면 웃기는 거지. 거기서 김무생은 내가 때릴 줄 몰랐거든. (웃음) 사실 TV는 어느 정도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내가 던지면 저쪽에서 받아주는 재미가 있다. <서울 뚝배기>는 컷 끝나고 하는 내 대사가 더 재미있다면서 NG나기 직전까지 촬영을 했다. 항상 애드리브를 하는 건 아니고, 어떤 대본을 보면 애드리브가 마구 나온다. 김운경 작가가 원래 애드리브를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형 애드리브하는 재미에 드라마 본다고 그런다. 내가 그 사람하고 잘 맞는 거지.

노장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서로 맞춰가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우리야 서로 잘 아니까 뭐. 그래도 가끔 저건 저렇게 받으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자기 계산 하는구나 싶을 때는 있다. TV나 영화나 혼자서 연기하려는 사람은 꼭 있다. 그 교향곡을 지휘하는 게 감독인데, 일일이 간섭하면 서로 삐치니까 못하는 거라구. 영화는 카메라도 있고 배우도 있고 조명도 있지만, 일단 촬영 들어가면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세팅 다 하고 부르는 게 아니라 꼭 사람을 세워놓고 뚝딱거려. (웃음) 감정 다 잡았는데 카메라 감독이 저 뒤에 뭐가 걸린다고 치우라고 하고. 우리는 또 성질이 급하잖아. 싸움난다고. 영화하다보니까 짜증만 늘어서 손해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우가 감독이랑 싸우면 캐스팅이 되겠어? 뭐 다들 욕심이 있어서 그런다는 건 이해한다. 나도 앵글 바꿔 찍는다고 연기 다시 하라고 하면 그 연기가 똑같이 나오나 싶어 성질나지만, 배우로 자기 관리 못하는 게 있다. 먹을 건 다 처먹어서 배는 나오고 피부도 엉망이고. (웃음) 내가 하루에 담배 세갑 피우고 소주 두병 마신다. 우리 마누라가 당신이 배우 해먹고 사는 거 보면 참… 그러지. (웃음)

코미디 연기뿐만 아니라 무거운 연기를 할 때도 존재감이 상당하다. 연기를 공부한 적도 없는데.

무거운 건 몸 자체가 무겁고. (웃음) 나도 말없이 터프하고 툭 한마디 던지는 게 멋있는 남자를 하고 싶은데, 그런 배역이 안 와. (웃음) 만날 떠들기나 하고. 그런 아버지가 무슨 멋이 있겠나. 외국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외국 감독들이 배우 매력포인트 찾아주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 앵글이 좀 이상하게 나왔다 싶어도 표정이 좋으면 그걸 살려주고. 예전에 연출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나한테 그러더라. 야 너는 정통으로 배운 것도 없고 계보도 없는데 끝까지 남아 있는 비결이 뭐냐. 그래서 내가 그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보고 화장하고 친구 만나는 게 다 연기라고. 호주에 유명한 배우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뭘 가르치느냐 하면, 나가서 껌팔이 해봐라 노숙자 해봐라, 이런 거다. 연기는 자기 타고난 감성에다 체험을 더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있나, 계보가 있나. 모노드라마라도 하면 자기 연기가 보일지 몰라도 사실 연기는 종합이다. 감독 잘 만나야 하고 상대배우 잘 만나야 하고 홍보도 잘 만나야 하고. 배우는 흉내에서 시작해 예술까지 나오는 거다. 흉내 잘 못 내면 바로 망하는 거지만. (웃음)

<해피엔드>를 찍을 때 캐릭터 분석을 꼼꼼하게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한꺼번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편안하고 작은 역 같으면 마음을 놓을 때가 있다. CF 찍을 때도 내가 이렇게 한번 해볼 테니까 쓰려면 쓰고,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시작한다. 그게 몸에 익으면 있는 그대로 내추럴한 코미디가 나오는데 요즘 코미디는 억지가 많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으니까 좋더라고. 상상이 되니까. 상상이 되면 좋은 시나리오라는 뜻이다. 그런데 해프닝만 있고 영화를 끌고 가는 큰 줄거리가 없어서 아쉽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나.

영화구경 하는 걸 남들보다 훨씬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끼였던 것 같은데, 서부영화 보고 나서 쌍권총 돌리고, 거울 보면서 모자도 비스듬히 써보고 그랬다. 그래서 군사영화 다큐멘터리 찍을 때 연기가 바로 몸에 와서 붙었던 거지. 그게 드라마 반 다큐 반이었는데 그걸 본 KBS 국장이 젊을 적 신영균 스타일이라고 하면서 나를 특채로 뽑았다. 우리 때는 또 그런 게 있었다. 다들 돈이 없으니까 영화 본 자식 하나가 학교에 와서 처음부터 엔딩까지 얘기를 쫙 해주는 거야. 첫 장면에 자동차 한대가 먼지를 날리면서 지나가는데… 마지막엔 헬리콥터가 타악 뜨면서 눈물이 주르륵… 이런 식으로. 나는 감독이 바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내가 <스타탄생>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거 끝날 때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애인이 차사고로 죽는다. 우리 같으면 붙들고 울고불고 할 텐데, 이 여자는 남남처럼 그냥 걸어가. 아, 저 죽일 년 하면서 난리를 치는데, 그 앞모습을 보면 울어서 눈이 퉁퉁 불어터졌다는 거지. 그게 영화의 야마야. 감독이 감정을 어떻게 꺾을 것인가 하는 거. 그래서 배우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하는 거고, 그건 90% 정도 운이 결정하는 거다. 이번 영화 하면서도 많이 걱정했다. 처음으로 주연 비슷한 거 하는데 잘못 해서 야 주현이 도로 TV나 해라 이러면 어떡하냐고. 항상 아슬아슬하다.

완성된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떻던가. 흥행이 걱정되는지.

재미있는 연기를 많이 했는데 다 잘렸다. (웃음) 노리는 건 퇴물들이 오래간만에 모였다니까 궁금해서 보러오지 않을까 하는 거. 열심히 찍었다는 건 보여서 마음에 든다. 나는 흥행은 잘 모르겠다. 요즘 애들 웃는 거 보면 저거 뭐 웃기나 이런 생각이나 들고. 예전에 곽경택 감독이랑 술을 마셔보니까 사람이 괜찮고 나랑 잘 맞아서 <친구>에 출연을 했다. 대박날 줄 알았으면 많이 좀 넣어줘라 했을 텐데, 야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줄여라 그랬다고. (웃음) 젊었을 때는 돈생각 안 하고 작품이 좋으면 무조건 찍었다. 그래서 〈TV문학관>도 아마 내가 제일 많이 찍었을걸? 40년 동안 한번도 안 쉬고 일했다. 딱 한번 8개월 논 적이 있는데 KBS 가보니까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PD들이 다 나랑 한번씩 싸운 PD들이야. (웃음) 아무도 안 써줘서 놀았지. 사실 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하다. 그게 다 시청자들이 나를 예뻐해줘서 그런 거겠지. 나는 동양에 맞는 이야기, 동양 배우에 맞는 영화를 찾고 싶다. 대작영화 만들어서 필생을 한번 걸어봐야 하는데… 어휴, 되겠어. 술부터 끊어야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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