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케빈 스미스의 6번째 장편 <저지걸> 월드 프리미어
2004-03-1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타고난 재담꾼이 푸는 관계의 방정식

‘저지걸’(jersey girl),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뉴요커들이 누군가를 향해 촌스럽다는 조소를 보내기 위해 곧잘 사용한다는 속어. 하지만 지난 3월4일, 한번도 뉴저지를 떠나본 적 없는 그곳 출신의 케빈 스미스는 <저지걸>이라는 제목으로 6번째 장편영화를 들고 와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시사회를 열었다. 데뷔 시절 그의 영화 전력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또 한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조롱 섞인 맞대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케빈 스미스는 의외로 진지하다.

2000년, TV만화시리즈 <클라커즈>(그의 1994년 장편 데뷔작 <클라커즈>에서 상황과 인물들을 가져왔다)의 각본과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케빈 스미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아내와 두달 된 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만약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 혼자 딸을 키운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문득 궁금해한다. 두 시간 만에 40쪽 분량의 시나리오 일부를 썼고, 우연한 기회에 친구 벤 애플렉에게 그것을 보여준다. <체이싱 아미> 같은 영화를 한번 더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던 벤 애플렉은 당장 너의 다음 작품은 이것이 돼야 한다고 바람을 넣었고, 어느 유쾌한 홀아비의 육아일기는 그렇게 탄생하게 된다.

음반 사업계의 전도유망한 홍보부장 올리(벤 애플렉)는 아름다운 여인 거트루드 스테이너(제니퍼 로페즈)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른다. 둘 사이에 딸 거티(라켈 카스트로)가 태어나지만, 아내 스테이너는 출산 중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아내의 죽음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달리던 올리는 동료 아서(제이슨 빅스)의 충고도 무시한 채 한창 주가를 올리던 가수 ‘윌 스미스’(윌 스미스)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직장에서 쫓겨난다. 고향 뉴저지 하이랜드로 돌아온 올리는 아버지(조지 칼린)를 따라 청소용역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딸 거티를 키운다. 7년이 지나 딸 거티는 또랑또랑한 소녀가 되었고, 올리는 우연히 만난 비디오 가게 점원 마야(리브 타일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거티의 학예회에서 같이 노래를 불러주기로 약속한 올리는 잡기 힘든 회사 면접기회와 날짜가 겹치자 딸과 회사 중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대기실에서 윌 스미스를 만나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형식보다 진심 앞세운 13살 이상 관람가 영화

시작부터가 그러하긴 하지만 케빈 스미스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성장한 뉴저지의 하이랜드를 영화의 주배경으로 한다. 유년 시절 스스로가 그토록 좋아했으면서도 볼 수 없었던 손트 하임의 뮤지컬 <스위니 토드>(위층 이발소에서 사람을 죽여 아래층 파이집으로 내려보내 인육 파이를 만든다는 내용)를 영화 속 거티의 학예회 장면으로 삽입하기도 한다. 뉴저지의 지명을 악용해서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이름을 빌려 오히려 부드러운 쇄신을 시도한다. 여기에는 물론 가족 구성원이 되는 배우들의 몫이 마련되어 있는데 절친한 친구 벤 애플렉이 전작들에 이어 다섯 번째 익숙한 출연을 했고, 아직 그때까지는 애플렉의 연인이었던 제니퍼 로페즈까지 동시에 출연했다(그러나 출연 분량은 아주 적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티 역의 아역배우 라켈 카스트로를 두고 “벤과 제니퍼를 반반씩 닮은 것 같다”고 신기해했다. 실제로 케빈 스미스는 라켈 카스트로가 제니퍼 로페즈의 웃음을 닮을 수 있도록 주문까지 했다고 한다. 또, 요정의 옷을 벗고 당돌한 아가씨로 변신한 리브 타일러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는 훨씬 생동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케빈 스미스는 <저지걸>을 “부모가 된다는 것의 책임”을 생각해보는 영화이며, “아버지에 관한 영화”라고 소개한다. 그 말은 곧 이 영화 안에서 욕쟁이 제이와 사일런트 밥(항상 케빈 스미스 자신이 연기해온 그 배역), 아이스 하키에 대한 침튀기는 설왕설래, 막 나가는 신의 천사, 코믹북 주인공들의 찬란한 명단, 듣기 민망한 성인용 욕설 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벤 애플렉이 말하듯, “케빈 스미스가 만든 첫 번째 13살 이상 관람가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케빈 스미스는 늘 발휘하던 수다의 재치와 이야기의 상상력을 가족이라는 세계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유연하게 변용한다. 전에 없이 조롱보다는 안식이 배어 있고, 싸움보다는 화해의 무드가 강하게 깔려 있다. 분명히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감정적으로는 화목함이다. 그러나 전작 <체이싱 아미>에 비교한다면 그 예외를 경험하는 재미만큼 독창적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도 <저지걸>은 케빈 스미스가 형식보다 진심을 앞세워 만든 영화라고 인정하면 될 것이다. 4월9일이 오면 그 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감독 케빈 스미스 “내 영화들은 모두 내 인생의 스냅사진이다”

<저지걸>은 지금까지의 당신 영화와 많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들은 모두 그 당시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스냅사진 같은 것이다. 확실히 이 영화를 만들 때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온통 내 사고를 채우고 있었다. 이전에 만들었던 <제이 앤 사일런트 밥>과는 확연히 다른 영화지만, <체이싱 아미>와는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와 드라마가 섞여 있고 단지 레즈비언과의 관계가 아니라 어린 딸과의 관계를 다뤘다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다.

미국인들이 “저지걸”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나.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저지걸을 화려한 머리 스타일에 물빠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사람들의 그런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살짝 비틀어 어린 소녀를 저지걸로 표현해낸 것이다.

<저지걸>을 케빈 스미스의 예외적인 작품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앞으로의 향방을 예측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봐야 하나.

아마도 이번 영화가 유일한 경우가 될 것 같다.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 영화 안에서 모두 한 셈이다. 아버지로서의 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내 딸이 십대가 되어 남자친구를 사귀고 약을 하고 반항기에 접어들 때쯤 새롭게 할말이 생길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이 한번으로 족하다.

로맨틱코미디의 관습들을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뛰어넘으려 했나.

난 이미 적지 않은 로맨틱코미디를 찍은 셈이다. <몰랫츠>도 어느 면에서는 로맨틱코미디의 성격이 강하고, <체이싱 아미> 역시 그런 영화이다. <저지걸>은 로맨틱코미디이긴 하지만 성격이 좀 다른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두 남녀 사이의 로맨스가 아니라 딸과 아빠,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맨틱코미디라기보다는 관계에 관한 영화이고, 그런 영화야말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 주연배우 벤 애플렉 “혼자 아기를 키우는 아버지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당신을 그토록 매혹시켰나.

케빈의 시나리오는 항상 좀 긴 느낌이 있다. 그런데 <저지걸>에서는 초반 40쪽까지 아내의 죽음, 아버지가 혼자서 아기를 키워야 하는 상황, 잠들어 있는 아기에게 다짐하는 장면 정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바로 그 혼자 아기를 키워나가는 아버지라는 상황 설정과 감정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고, 그래서 케빈에게 꼭 계속 시나리오를 완성해달라고 말한 것이다.

<체이싱 아미> 때의 어려움과 비교하면 어땠나.

제일 큰 차이점은 <체이싱 아미>가 예산 25만달러밖에 안 되는 소규모 영화였다는 점이다. 그 예산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정말 고된 일이다. <저지걸>은 훨씬 큰 규모의 영화이고, 시간 여유도 많았고, 로케이션 장면 역시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출연하는 배우들이 전기 작업을 하거나, 트럭을 몰거나 하면서 현장과 관련된 일들을 동시에 해야 했다. <저지걸>에서는 연기만 하면 됐고, 잠을 잘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케빈 스미스 감독과는 많은 논의를 하면서 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도 그런 특별한 장면이 있었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긴 하지만, 주로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거야?”라고 물어보고, 아니라면 더 논의하고 맞다면 계속 가는 그런 정도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케빈은 훌륭한 작가여서 내가 도움을 줄 일이 별로 없다.

영화 속에서 리브 타일러(마야)와의 로맨스는 본격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 아쉬움은 없나.

일단 이 영화는 올리와 마야의 로맨스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실 둘 사이의 관계를 더 진전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딸아이를 둔 아버지의 로맨스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야의 존재는 올리에게 과정의 시작점이며, 정서적인 상처의 치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이 내가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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