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강박에 시달리는 한국 로맨틱코미디
로맨틱코미디는 결투의 기록이다. 두 주인공이 옹알종알 닭살 돋는 대사만 나누어서는 이 장르가 유지될 수 없다. 둘은 서로를 쟁취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야 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대부분의 커플들은 종전을 선언하거나 휴전을 맞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맨스는 그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의 양성평등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식이다. 로맨틱코미디는 그중 정점에 위치한다. 비극적인 로맨스를 쓰기 위해 두 주인공들이 같은 위치에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로맨틱코미디는 다르다. 두 사람이 공정한 결투를 하기 위해서는 둘이 어느 정도 평등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 탈레반 정권하의 아프가니스탄은 나중에 비극적 로맨스의 무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를 무대로 한 아프가니스탄 버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나올 수 있을까?
이렇게 보았을 때, 90년대 이후 한국 로맨틱코미디의 부흥은 두 가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적어도 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런 로맨틱코미디의 설정이 관객에게 작위적인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까지는 성장했다. 둘. 한국영화의 형식이 그런 설정을 담을 만큼 ‘쿨’한 형식을 개발했다. 지금은 첫 번째에 대해 깊이 논의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두 번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언급을 해야 할 듯하다.
로맨틱 코미디는 양성 평등의 산물
우선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언제부터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에 입맛이 길들여진 관객의 비위를 맞출 만한 외양을 개발했을까? 아마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일 게다. 그리고 그 과정 중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동시녹음이 일반화되었고 대사들이 사실적으로 바뀌었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후시녹음에 전문 성우를 기용하는 전통은 자연스럽게 대사와 연기를 양식화된 스타일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이란 비정상적일 정도로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노골적인 건 기울어진 언어의 성적 균형이었다. 곧장 말해 남자들이 특별히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여자들에게 말을 놓고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올려붙이는 습관이 아주 당연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 로맨틱코미디의 본격적인 부흥은 여자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말을 까면서 시작되었다고.
아마 모든 것들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결혼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신혼부부의 결혼생활에 대한 영화들이었으니 우리나라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장르는 엉뚱하게도 결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던 셈이다. 일련의 안이한 기획으로 느긋하게 명맥을 유지하던 이 장르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엽기적인 그녀>의 거의 비정상적인 성공 이후이다. 올해만 해도 <내사랑 싸가지>나 <그놈은 멋있었다>와 같은 인터넷 소설 원작의 영화들이나 <그녀를 믿지 마세요> <어린 신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같은 영화들이 ‘로맨틱코미디’라는 깃발을 들고 영화관을 찾아온다.
그러는 동안 한국 로맨틱코미디는 자생적인 공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70%의 코미디와 30%의 멜로드라마. 업계 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공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이 어색한 조합은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과 한류 열풍 이후 이 장르영화들이 해외 관객에게 소개된 뒤 한국 로맨틱코미디 고유의 흥미로운 특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이 공식은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나 <결혼 이야기>를 들여다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당시의 영화에는 노골적인 멜로드라마 결말이 약한 편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어느 정도 정서적인 감흥을 허락하기는 해도 배꼽빠지는 코미디와 눈물 찔끔 멜로를 그렇게 직설적으로 연결한 영화들은 아니었다. 아니, <결혼 이야기>는 조금 그랬던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그 영화에는 논리적인 일관성이 존재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로맨스로 영화가 끝난다는 게 아니라 그 로맨스가 거의 예외없이 평범하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왜 이들은 앞에서 그럴싸하게 쌓아올린 코미디의 덕을 보지 못할까? 이 영화들은 거의 작정하고 가능성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 만약 한 영화가 지루하고 뻔하다면 그 작품이 대상에 대한 충분한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채 고정된 선입견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흥미진진하게 시작된 영화가 중간에 뻔한 신파로 주저앉는다면, 작가나 감독이 자신이 가진 재료의 가능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오히려 저항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후반부의 로맨스는 자기가 직접 선택한 소재에 대한 감독과 작가의 탄압이며, 반혁명이다. 의심나면 한번 재검토를 해보시길. 최근에 나온 이런 식의 로맨틱코미디들은 대부분 후반 부분을 여자주인공의 순화과정이나 변명에 할애하고 있다. <엽기적인 그녀>를 보라. 알고 보니 주인공은 엽기적으로 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주인공은 착한 시골 사람들과 지내면서 감화를 받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성격이 천사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서 땍땍거리는 서울 출신 치과의사는 엉뚱한 홍반장에 의해 좀더 ‘성숙한’ 인물로 변해간다. 이 모든 것들은 캐릭터의 성장 또는 심화를 의도하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대부분 무장해제 이상은 아니다. 영화는 관객이 여자주인공을 사랑하길 바라는데, 그 유일한 해결책이 주인공의 무섭고 비정상적인 부분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니 말이다.
코미디를 까먹는 멜로
남자들은 어떤가? 내가 본 영화 중 단 한편만이 그 비슷한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영화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이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친구가 겪는 ‘순화 과정’은 앞에 나온 영화들의 여성캐릭터들에게 닥친 일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원래부터 돈 많은 집안의 싸움 잘하고 폼나는 인간으로 등장한 남성캐릭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자신의 상대적 위치나 폼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내사랑 싸가지>를 보았다면 비슷한 소재에 대한 비교 분석이 가능할 텐데, 미안하지만 그 영화는 보지 못했다.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잘한 선택이라고 하고 줄거리와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면 그들의 말이 맞는 듯하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영화가 <동갑내기 과외하기>보다 특별히 더 긍적적인 영화일 리가 없다는 것이니까.
선입견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 아까 나는 한국 로맨틱코미디의 시작은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말을 까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실생활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언어습관이 영화나 문학(특히 번역문학)에 반영되는 데에는 정말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솔직히 아직 제대로 반영된 것도 아니다. 모 자막 번역가가 당연히 상사인 여자주인공에게 툭툭 말을 까는 남자주인공의 대사 때문에 욕 먹은 게 겨우 몇년 전 일이다. 번역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정말 말을 말지.
지금의 한국 로맨틱코미디는 말까는 과정의 제2기에 서 있다. 적어도 이 장르의 여자주인공들은 코미디 파트에서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슬슬 이제 그 당당함과 독기가 로맨스에도 이어져야 할 판이다. 말이 쉽게 먹힐 리는 없겠지만, 앞으로 이 장르를 파는 사람들에게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사실 하나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감동을 주려고 주인공에게서 독기를 뺄 필요는 없다.” 그들이 재미있고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그 독기 때문이고 진짜 감동과 성장의 열쇠도 그 독기에 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같은 영화들의 순하디 순한 결말은 멀쩡하게 잘 만든 김치를 물에 헹궈 심심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아무리 우리나라 관객이 감동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정도의 고춧가루도 소화 못할 정도로 갓난아기들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