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미국 최대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까지 받으며 화제를 모아온 독립 다큐멘타리 <송환>이 독립영화인들의 손으로 힘겹게 19일 개봉하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개봉을 앞두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이 터졌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좇으며 우리 시대의 상처 한가운데를 짚는 이 영화의, 예상되는 주된 관객층은 촛불 들고 광화문 집회로 나갈 이들과 겹친다. ‘<송환> 보고 집회장에 갑시다!’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것같다.
‘장기수 문제를 다룬 다큐멘타리라니, 골치 아프겠군’ 하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송환>은 메세지를 내세우지 않는다. 연출없이 재현된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말에서, 표정에서, 다른 사람 대하는 태도에서, 심지어 침묵에서 지금 시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인생과 노년에 대해, 과거와 미래의 의미에 대해 많은 걸 읽게 한다.
차분한 연출로 그렇게 관객과 대화하면서도, 수시로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또 폭소하게 하는 편안하고 쉬운 영화다. 상영관은 서울 하이퍼텍나다, 씨네큐브, 뤼미에르, 씨어터 2.0과 광주의 광주극장, 대구의 필름통, 부산 DMC, 제주의 프리머스제주 등 8곳이다. 12살 이상 관람가 영화인만큼 온 가족이 함께 가도 좋다.
주현, 박영규, 김무생, 송재호, 선우용녀, 양택조 등 중장년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도 별미다. 코믹한 에피소드 속에 드러나는 노년의 몸부림이 가벼워 보이는 듯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독특한 영화다.
주말 상영작 리뷰<모나리자 스마일>, 전통 장벽깨기 ‘귀여운 여인의 도발’
1950년대 웰슬리의 풍경을 민속지처럼 그리는 <모나리자 스마일>은 바로 위 사진, 말하자면 50년대 버전의 ‘모나리자 스마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제목 뒤에 물음표를 하나 추가한다. <모나리자 스마일>은 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 나체시위보다 힘든 투쟁이었던 50년대 진보적 여성의 싸움을 그린 여성영화다.
‘신부수업’ 범생이와 진보적 교수,‘죽은 시인의 사회’여성 버전웰슬리에 캐서린 왓슨(줄리아 로버츠)이 미술사 교수로 새로 부임한다. 자유로운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캐서린의 열정은 전통주의의 성역인 이 대학에 발딛자 마자 산산이 부서진다. 여성들의 고등교육을 ‘귀부인’이 되기 위한 신부수업 정도로 생각하는 학교 당국과 학생들의 완고한 사고는 캐서린의 학문적 열정을 노처녀 히스테리 정도로 받아들인다. 고전만 배워온 지금까지의 수업내용과 달리 현대미술 중심인 캐서린의 수업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다.
<모나리자 스마일>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여성 버전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부재한 학생들과 이들을 계도하는 선생의 갈등과 절망, 그리고 승리가 기승전결 구도로 명쾌하게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장벽을 깨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여성영화라기보다는 줄리아 로버츠라는 몸값 비싼 배우를 내세운 소영웅담처럼 느껴진다. 줄리아 로버츠는 <에린 브로코비치>에서도 현실의 한계와 싸우는 여성을 연기한 적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줄거리와, 교과서적인 대사와 연기로 <메리 라일리>에서의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나 <귀여운 여인>등이 입증했듯이 줄리아 로버츠의 매력은 정돈이 아니라 좌충우돌하는 에너지에서 나왔음을 이 영화는 깜빡 잊은 것같다.
도리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학생들, 할리우드에서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한 젊은 배우들의 매력에서 발산된다. 학교 육성회장의 딸로 전통적 가치에 누구보다도 집착했다가 남편의 배신으로 현실에 눈을 뜨는 베티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냉소적 표정, 예일법대 입학서를 받은 재원이지만 결국 결혼으로 유턴하는 조앤 역의 줄리아 스타일스가 내뿜는 우아함, 자유분방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지젤 역의 매기 질렌홀이 보여주는 흔들리는 듯 위태로워 보이는 매력은 이들이 출연하는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여주인공은 시골 소도시 슈퍼마켓의 점원인 로잘리(케이트 보스워스). 인기절정의 남자 배우 테드 해밀턴(조쉬 두하멜)의 열혈 팬이다. 마침 테드는 음주운전 가십기사로 평판이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테드의 매니저들은 이걸 만회하기 위해 ‘테드와의 데이트’라는 자선 이벤트를 마련한다. 소정의 자선기금을 내고 응모한 여자들 중 한명을 추첨해 테드와 저녁식사 데이트를 하게 한다는 것. 200만대 1의 확률을 뚫고 로잘리가 당첨된다. 할리우드로 가서 테드와 저녁을 먹는다.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러나 그날 밤을 함께 보내자는 테드의 제안은 사절하고 돌아온다. 며칠 뒤 로잘리의 슈퍼에 당대의 스타, 테드가 찾아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는 시골여자가 대스타의 사랑을 얻게 되는 또다른 신데렐라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런데 복병이 있다. 어릴 때부터 로잘리의 친구였던 피트(토퍼 그레이스)는 로잘리를 사랑하지만 그걸 말하지 못해 왔다. 피트는 테드와 로잘리가 가까워지지 못하게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그럼 신데렐라 이야기냐, 아니면 ‘알고보니 사랑이 가까운 데 있더라’는 쪽이냐.
이것도 많이 다뤄져온 갈등이고, 이럴 때 영화는 두 남자 중 한쪽을 좀 더 치사하게 만들면 된다. 감칠맛 나는 대사나, 신선한 디테일이 부족한 편인 이 영화의 매력을 꼽는다면 두 남자를 공평하게 다루고, 그래서 결과가 쉽게 예측되지 않는 긴장감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테드는 자유분방하고 피트는 순정파이다. 그렇다면 요즘 영화답지 않게 섹스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영화의 모습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도 있다. 결과가 어떻든, 영화는 테드를 비난하지 않고 단지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게 완고하고 흔해 보이는 이야기에 숨통을 터 준다. <금발이 너무해>의 로버트 루게틱 감독. 19일 개봉.
19세기말 미국 육군의 우편배달병이던 프랭크 홉킨스(비고 모르텐슨)는 운디드니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건을 목격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섞인 혼혈인인 프랭크는 사건의 충격에서 잘 헤어나지 못한 채 카우보이 쇼단에서 자신의 말 히달고와 함께 쇼를 하며 산다. 그의 특기는 말타기 경주이고, 대회마다 우승했다. 어느날 쇼에 아랍 상인이 와있었다.
쇼의 사회자가 ‘세계에서 가장 잘 달리는 말’이라고 히달고를 소개하자 이 아랍인이 그 발언의 취소를 요구하고 나선다. 프랭크가 거절하자, 아라비아 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이 아랍인은 프랭크를 아랍 사막에서의 말경주로 초대한다. 수백년간 열려온 ‘불의 대양’이라 불리는 이 대회는, 아랍 사막 4800㎞를 건너가야 하는 고난과 인내의 경기다.
실존 인물 프랭크 홉킨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히달고>는 여기까지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방인 프랭크의 우승을 막으려는 몇몇 아랍인들의 음모, 영향력이 큰 아랍 족장 시크 리야드(오마 샤리프)와의 갈등과 화해 및 우정을 픽션으로 삽입한다. 시크 리야드의 딸 자지라(줄레이카 로빈슨)와의 우정과 애정 중간쯤의 로맨스도 빠뜨리지 않는다.
프랭크가 이 대회를 통해 학살의 악몽을 극복하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다는 중심 설정은 고전적이지만, 그가 겪는 모험은 만화처럼 가볍게 이리저리 날뛴다. 잘 찍힌 사막의 풍경은 이 영화의 훌륭한 볼거리이다. 해뜰 때부터 한밤까지, 말라 갈라진 흙땅에서 우아한 곡선의 무늬를 그리는 모래벌판까지, 사막 지대가 만들어내는 모든 풍경을 담아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