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송환>,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4-03-2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정직한 한 다큐멘터리스트의 카메라, 그들의 고요 앞에 부끄러워지다

1992년 봄, 한 신부의 부탁으로 남파공작원 출신의 두 비전향 장기수 김석형, 조창손씨를 만나러 간 김동원은 무심코 들고 온 카메라에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카메라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들 곁에 머물렀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을 때, 김동원은 500개에 이르는 비디오테이프 더미를 막막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북한으로 송환된 조창손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촬영된 비디오를 통해 “김동원 그 사람, 말은 안 했지만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뒤 그는 비로소 편집에 착수했다. 800시간 분량에 이르는 장기수 할아버지들과의 오랜 만남의 기록을 두시간반의 분량으로 요약한 <송환>은 그렇게 태어났다.

철거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행당동 사람들2>를 만들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김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론 이 사람들의 삶을 미화했다. 그러나 나는 선동적이며 교육적인 비디오를 찍었다는 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봉천9동 주거대책위원장을 떠맡았으며 자신이 찍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온, 그러니까 자신의 카메라 뒤가 아니라 앞에서 살아온 김동원은 비전향 장기수 송환 여론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송환>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정부가 먼저 송환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기력에 빠졌다. 조창손씨의 말을 전해듣고 그는 “해드린 게 별로 없는데도, 아들처럼 여기셨다는 말에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비약을 무릅쓰자면 <송환>은 어떤 무기력과 부끄러움의 기록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무기력과 부끄러움이 이 짧지 않은 다큐멘터리에 놀라운 생명력과 남다른, 하지만 대단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송환>의 주인공은 감독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장기수들의 삶에 관한 기록이라기보다, 김동원이라는 한국인이 자연인으로서의 장기수들과 더불어 지낸 시간의 기록이다. 그는 관찰자이자 내레이터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무사히 송환되기를 바랐고 그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결국 다른 이웃들과 함께 할아버지들을 눈물로 떠나보낸 다큐 속의 인물이다.

내레이션만으로 짐작컨대 김동원은 정치적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정치 노선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들이 야유회에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를 때, 카메라가 흔들릴 정도로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들을 좋아했다. 조창손씨와 함께 남파된 김영식 할아버지에게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얼굴’을 발견한다. 한 강직한 할아버지가 북한의 곤궁은 미국 책임이라고 주장할 때 선뜻 수긍하지 못하지만, 일본인 친구가 북한 체제를 비판하자 북한이 미국과 여전히 전쟁 중임을 그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의 내레이션은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사이를 방황하지만 그의 카메라는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가 그의 카메라를 통해 만나는 것은 비전향장기수들의 견해 혹은 어떤 승리가 아니라, 그들의 시간의 무게다. 전쟁에서 냉전으로 이어진 40여년간 병사로 혹은 공작원으로 그리고 전향을 거부한 장기수로 살아낸, 그리고 우리가 애써 지우려 한 그들의 세월은 끝이 보이지 않는 극한의 긴장과 공포, 피학과 고독의 연쇄다.

놀랍게도 그 세월의 끝에서 그리고 생의 막바지에서 그들은 고요하다. 남루하지만 따뜻하고 강건하되 여유롭다. 간수의 구둣발에 무수히 채였던 김영식씨는 “구두 끝을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싶어”라며 웃고, 과묵한 조창손씨는 김동원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다. 그들의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으나 그들의 강직함을 경외했고 그것의 뿌리를 궁금해했던 느긋하고 정직한 한 다큐멘터리스트의 카메라는 그들의 고요 앞에 한없이 무기력하고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결코 그들의 시간에 다가갈 자격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몸을 낮춘 카메라는 그들의 부드러운 동작과 순박한 웃음과 나직한 울음을 지긋이 응시한다. 송환을 도움으로써 방조와 망각이 낳은 죄의식의 일부라도 벗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했음에도 더할 수 없이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을 때, 김동원의 카메라는 자신의 무기력과 부끄러움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

주체하기 힘든 <송환>의 감동은 자신의 무기력과 부끄러움을 알게 된 카메라의 겸허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작에 걸린 12년이라는 시간마저 그들의 시간의 무게에 대한 카메라의 예의처럼 느껴진다. <송환>은 카메라의 시간이 역사적 시간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혹은 왜 결국 만날 수 없는가에 관한 뼈아픈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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