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의 성장기, <아홉살 인생>
2004-03-23
글 : 박은영
아이들은 아이들다워야 한다고? 아이들도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안다. 당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을 돌아보게 만드는, 유쾌하고도 서글픈 동화

“다행히 내 아홉살은 지나치게 행복했던 편은 아니었고, 그리하여 나 또한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위기철의 <아홉살 인생> 중) 모두가 같은 시기에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는 건 아니지만,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 참담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건 대체로 열살 언저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년의 아픔을 담아낸 한국영화는 거의 전례가 없다. 순수로의 회귀, 동심을 통한 교화, 각성과 성장이 아이들에게 주어진 테마였을 뿐이다.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의 성장기 <아홉살 인생>이 극장으로 간 것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조숙하고 의젓한 아이 여민. 깡도 있고 싸움도 잘하지만, 그는 언제나 약자 편이다. 동네 쌈장을 제압한 뒤에도 “내가 이겼다고 소문내지 않겠다. 대신 애들 별명 부르지 마라”고 경고하는 식이다. 효심도 지극하다. 똥지게 수를 세고, 아이스케키를 팔고, 심부름을 해서 모은 돈으로 ‘애꾸’ 엄마에게 색안경을 선사하려 한다. 그렇게 듬직하고 무던하던 그의 일상이 흔들린다. 15도쯤 턱을 쳐들고 45도쯤 눈을 내리깐, 도도한 미소녀 우림이 전학오면서부터다.

영화판 <아홉살 인생>은 여민이가 괴이한 어른들과 부딪치면서, 선악의 이분법에 의혹을 품게 되는 과정을 상당 부분 생략했다. 대신 가족, 친구, 이웃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의 연결고리로 ‘로맨스’를 택했다. 여민이는 서울서 전학 온 우림이를 마음에 두면서부터, 볼품없는 도시락을 부끄러워하고, 단짝 친구들과 소원해지고, 담임에게 수모를 당하고, 짱의 대의를 회의하게 된다. 다, 그놈의 사랑 때문이다. 영화 전면에 부각된 여민과 우림의 로맨스를 목도하는 재미는 솔솔하다. 다투고 토라지고 화해하길 반복하는 이들은 어른 연애에 버금가는 ‘밀고 당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젠 니가 싫어졌다”는 우림에게 “니는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나?”라는 여민의 질책은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와 비견될 만하다. “안 들은 걸로 하겠다”는 우림에 대한 여민의 응수는 또 어떤가. “아니다, 들은 걸로 해라.”

여민의 고민은 주변 에피소드와 함께 깊어간다. 골방 철학자는 ‘미워할 수 없는 속물’ 피아노 선생에게 구애하고, 편지 심부름을 하던 여민은 그를 연애 코치로 모시게 된다. “말로 할 수 없는 건 글로 써야 한다”거나 “이별이 슬픈 건 떠난 사람에겐 해주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골방 철학자의 말을, 여민은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긴다. 나란히 진행되는 두 커플의 연애담은, 닮은 구석이 많다. 골방 철학자와 피아노 선생은 어쩌면 미래의 여민과 우림의 모습일 수 있다. 비련의 현실보다 미완의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아홉살 인생>에는 따뜻했던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배어 있다. 가난하지만 단란한 여민의 가정은 검은 제비의 싸움쟁이 부모,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는 우림이 가족의 실체와 대조를 이룬다. 지난날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때려주기 위해 만든 것이 학교’라는 믿음은 아이들을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담임의 폭력적인 언사로 더욱 공고해진다. ‘어린이판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비유도 이 대목에서 설득력을 발한다.

이만희 작가의 재치 넘치는 대사, 영화와 밀착된 노영심씨의 담백한 음악도 돋보이지만, <아홉살 인생>의 보배는 역시 아역 배우들이다. 여민 역의 김석이나 우림 역의 이세영처럼 연기 경험이 있는 아이들의 노련한 연기도 뛰어나지만, 순수 아마추어인 나머지 아이들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상대적으로 성인 배우들의 연기는 다소 과장돼 보이고, 편집에서 잘려나간 탓인지, 각자의 사연(다소 전형적인)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채, 전체 이야기에서 겉도는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사무치는 상실의 아픔을 겪던 날, 거센 눈보라가 몰아친다. 쓸쓸한 뒷모습의 여민이 걸어올라가야 하는 계단은 유난히 가팔라 보인다. 여민이와 함께 우리는 그 계단을 하나둘 오르는 중이다. <아홉살 인생>은 이제는 아찔한 높이로 올라선 계단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잠시 뒤를 돌아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 어쩐지 올 봄엔 ‘아이러브스쿨’이 다시 유행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아홉살 인생> 윤인호 감독 인터뷰

진심으로 만든 아이들의 로맨스

일반 시사 반응이 좋다. 예감이 어떤가.

여느 때와 똑같다. 시사회 반응 봐선 잘 모르겠더라. 공평하게 봐줬으면 한다. 아이들 영화니까, 저예산영화니까 봐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거슬린다. 나도 스탭들도 아이들도 최선을 다했고, 그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걸로 믿는다. 다만 출연한 아이들에 대해선 우려되는 점은 있다. 지금은 매스컴에서 주목하지만 어느 순간 관심이 끊어질 텐데, 그때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개봉 뒤에 아이들 가정 방문을 할 생각이다. 아이들이 후유증을 앓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려 한다.

결과물은 만족스럽나. 의도대로 가지 못한 부분이 있나.

계절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 애초 계절이 바뀔 때의 애잔한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연기 잘해준 아이들에게 너무 고맙고, 또 그들을 괴롭힌 게 미안하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에게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낸 비결은.

대본도 못 보게 했고, 대사도 못 외우게 했다. 대사 외워 오면 야단을 쳤다. 상황만 이해하도록 했고, 대사는 그날그날 현장에서 만들어줬다. 그래서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체되곤 했고, 그 점이 스탭들에겐 미안하다. 하지만 연기에 균형을 맞추고 생동감을 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어른들 이야기는 겉도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어른들 이야기를 연결해서 편집하느라 했는데, 1시간 분량이 넘쳤고 편집 과정에서 어른들 에피소드가 많이 줄었다. 골방 철학자와 피아노 선생, 그리고 여민이의 관계가 잘 살아나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

원작과 달리 이야기의 무대는 부산이고, 이야기의 초점은 로맨스다.

서울 말로 대사를 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경상도 사투리로 바꿨다. 또 내가 원작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인물이 우림이었기 때문에 로맨스를 부각시켰다. 여민이를 효성이 지극한 아이로 바꿔 설정한 것도 다 나의 대리 만족을 위해서였다. 내가 불효자였기 때문에. (웃음) 언론 시사 때 ‘진심으로 만들었다’고 소개한 것은 이렇게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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