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람의 전설> 감독·주연배우 수다난장 [1]
2004-03-26
글 : 이영진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바람의 전설>의 감독 박정우와 주연배우 이성재의 탱고 같은 수다 한 스텝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이성재(34)와 박정우(35) 감독은 종종 밤샘 통화를 시도한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촬영현장에서 그렇게 붙어다니면서 떠든 것도 모자라(심지어 집도 지근이라 촬영장을 오가는 동안 이성재가 운전하는 차에 박정우 감독이 동승했다) 집에서까지 교신을 시도하냐고. 본인들 스스로 ‘미친 짓’이라면서 수화기를 들곤 한다니 못 말릴 일이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4월9일 개봉하는 <바람의 전설>은 두 사람을 더욱 각별하게 만든 계기임에 틀림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로 만나 인연을 이어온 이들이 이번엔 감독과 배우로 만났다. “온 세상이 춤바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었다는 <바람의 전설>은 제비라고 불리지만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춤꾼 풍식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클로즈업한 영화. 성석제의 소설 <소설쓰는 인간>이 원작이다. 말솜씨 좋은 극중 풍식을 불러들여 한살 터울의 초짜 감독과 베테랑 배우가 벌인 티격태격 설전의 일부를 소개한다.

# 1 ‘예술’가지고 예술한다고 하대요

“제 이름은 박풍식. ‘왕제비’로 불리죠. 양식있는 사람들은 ‘사교댄스의 황제’라고 합디다만. 50년 전 ‘헌병대 대위를 사칭하면서 능란한 춤솜씨로 카바레를 전전하며 70여명의 여대생을 농락한’ 박인수와 같은 핏줄이라는 풍문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는데, 다 ‘예술’을 모르는 자들이 지껄이는 말들이니 신경 두지 마시고. 요즘엔 그래도 많이 좋아졌나 봅니다. 볼룸댄스 동호회다 뭐다 전국에 저를 지지하는 이들만 400만명이 넘는다니까. 5년 전에 소설가인 성석제씨가 저를 거둬들이셨을 때만 해도 전 어둠의 자식이었거든요. 지난해에 박정우, 이성재 두 남자가 찾아와서 제 인생을 영화로 찍겠다고 했을 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했습니다.”

박정우 5년 넘게 꼬불쳐놨던 시나리오야. 이걸 쓴 게 <키스할까요> <산책> 썼을 무렵인데. 누구한테 각색을 부탁받았는데 원작을 보니까 괜찮더라. 그래서 10일 만에 쓱 썼는데, 영화가 흐지부지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공력이 좀 쌓이면 그때 직접 연출해야겠다고 묵혀놨었지.

이성재 데뷔작이었던 <간다>가 안 돼서 한 거잖아.

박정우 <간다>는 니가 하겠다고 해서 엎어졌잖아. 원래는 20대 배우를 써야 하는데 니가 하겠다고 해서 올드한 영화가 돼버린 거지. 그래서 보류됐고.

이성재 다음에 할 땐 김래원, 조인성 뭐 이런 배우들하고 해야겠다.

박정우 넌 그때 카메오나 좀 해주라. 나 입봉 때 너한테 ‘박정우 감독 작품 커밍∼순’ 뭐 이런 예고편 멘트 부탁하려고 했는데 못했으니.

이성재 왜 그러셔. 박 감독이 만드는 캐릭터 중에 나를 염두에 안 둔 게 있나.

박정우 <주유소 습격사건>의 노마크만 하더라도 훨씬 젊은 배우가 했으면 했던 거야. 주인공 결정됐다고 해서 사무실에 갔더니만 나이 먹은 니가 앉아 있어서 ‘아, 이 영화 찍기도 전에 끝났구나’ 속으로 그랬으니까.

이성재 나도 무슨 작가가 저러냐 그랬으니까. 자기가 무슨 로커인 것처럼 머리 기르고 창문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데. 첫인상이 저 사람, 인생 참 막살았구나 싶더라.

박정우 넌 원래 사람 대할 때 개무시하잖아.

이성재 누가 들으면 진담인 줄 알겠네. 그럼 나랑 왜 했냐?

박정우 촬영장에 갔는데 니가 너무 업되어 있더라고. 손에 은반지 하며 지포라이터며 설정들도 만들어오고. 자기가 쓴 시나리오에 광분하는 배우 보고서 싫어할 작가가 어딨냐.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네.

이성재 이번엔 나한테 이거 해볼래, 라고도 안 했잖아. 그냥 그러려니 있었는데 출연 기사부터 났더라고.

박정우 니가 딱이지. 물론 니가 춤을 못 추는 걸 미리 알았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만. 가까이서 오래 보니까 너한테도 일탈 욕망이 있구나 싶더라. 남들 앞에서 못해서 그렇지 욕설이든 음담패설이든 하는 것 들으면서 너의 쌈마이 같은 모습들을 본 거야. 추하기도 한 그런 모습이 풍식의 캐릭터하고 많이 비슷하지.

이성재 배우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게 있지. 나도 멜로연기 하는 것보다 그런 게 좋다고. 내 안에 내재된 욕구가 담긴 캐릭터를 연기할 때 훨씬 편하고. 근데 박정우 하면 조폭 나오는 코미디를 기대할 텐데 그게 아니라서 관객이 실망하면 어떡하냐.

박정우 일반 관객이야 박정우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 뭘. 하긴 우리 가족도 편집본을 보고 첫 장면부터 당황스러워 하더라. 코미디가 아니라면서. 그런데 이번에도 뭐 하나에 꽂혀서 그거에 죽도록 매달리는 인생이 주인공이라는 건 같지.

# 2 할렐루야, 일요일 예배당 같던 크랭크인 날

“지난해 9월. 사모님들까지 이승엽 홈런볼 잡겠다고 야구장에 가버렸는지 춤방은 텅텅 비었더랬습니다. 혼자서 데굴거리고 있는데 영화사에서 대관령에서 첫 촬영한다며 구경오라더군요. 너무 바빠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 한손으로 수화기를 붙잡고 뜸을 들이면서도 한손은 구깃한 의상을 펴느라 바빴습니다. 연미복 입고 에나멜 구두 신고 영화인들과 춤을 나누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짜릿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감독과 배우가 촬영을 앞두고 기도를 드리다니. 혹시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같은 종교영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절 과거를 회개하고 주님의 자식으로 거듭나는 순한 양으로 그리는 건 차마… 순간 전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박정우 그거 알아요? 성재 꿈이 목사였다는 거.

이성재 초등학교 때 이야기지. 그때는 체육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만날 양복 입고 다니는 선생님들 보다가 체육 시간에 운동복 입은 선생님 보면 어찌나 좋던지.

박정우 아닐걸. 공 하나 던져주면 편하게 수업 마칠 수 있으니까 그랬던 것 아닌가.

이성재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간 욕먹는다니까.

박정우 우리가 성격은 딴판인데 어울리는 것 보면 참.

이성재 사람한테도 그래. 난 누가 나한테 잘해준다 싶으면 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데 박 감독은 누가 잘해주면 좋다고 하니까. 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박정우 넌 특히 여자들이 나한테 잘해주는 걸 못 참지. 상대방의 선의를 항상 의심하고 와이프한테 이르겠다고 엄포나 놓고.

이성재 그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야.

박정우 난 너처럼 드라이하게 살고 싶진 않거든. 속아가면서 사는 거지.

이성재 본인이 좋다고 하면이야 내가 뭐라 하나. 근데 나중에 기분 나빠하고 싫어하니까 미연에 방지하라는 거지.

박정우 미운 오리새끼처럼 자라서 그렇다. 그래도 종교가 같아서 그나마 잘 붙어다니는 것 아닌가 싶다. 종교라는 게 한 사람의 세계관에 기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거니까. 게다가 이번엔 우연찮게 독실한 신자들이 많았잖아.

이성재 제작발표회 때 예배 보자고 그랬는데 안 된다고 해서 그럼 농담처럼 크랭크인 때 하자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지.

박정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뭐 시작할 때 항상 기도를 드리니까. 사람들한테 성경책이나 하나씩 챙겨와라, 했더니만 다들 가져오더라고. (김)수로가 사회를 봤지. 수로는 독실하긴 한데 기도 스타일이 좀 이상해. 이를테면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소원 들어주시옵고’ 뭐 이래야 하는데 ‘하나님, 있잖아요.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뭐 이런 식이잖아. 거의 대화체로 기도를 하지. 경건해야 하는 순간인데 수로가 다 버려놨지.

# 3 발바닥에 물집 좀 잡혔었겠군

“만날 붙어다니는 감독과 배우가 그날 밤 소주 한잔 사면서 이 영화는 이런 거다, 설명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오해할 뻔했습니다. 첫 촬영 때 첫 스텝을 밟는 배우의 춤도 저를 돌리는 데 한몫 했죠. 전문가조차 감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영화 대충 찍어 한몫 잡겠다는 인생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게 보여줬거든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춤방에서만 하더라도 ‘너절한 춤솜씨하고 상판대기만 믿고 제비짓 하다가’ 감옥 가는 친구들 많습니다. 제 친구 만수(아버님 존함이 한때 중동의 카사노바였던 ‘쿠웨이트 박’이었던가는 정확지 않습니다만)처럼요.”

이성재 어느 정도 연습하면 나머진 대역 쓰는 줄 알았지. 춤 배우러 학원에 갔을 때 어디 나랑 비슷한 체격의 남자 없나, 부터 봤다니까.

박정우 대역 쓸 생각은 없었어. 다만 니가 춤 연습하는 것 보면서 저건 안 되겠네 하나씩하나씩 포기한 거지.

이성재 내가 안 되더라도 그냥 하려고 한 건가?

박정우 그냥 될 때까지 해야 한다, 뭐 그랬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손 따로 음악 따로 가는, 누가 봐도 대역 쓴 것처럼 보이는 게 제일 싫었거든. 감독이라면 배우가 수준이 떨어졌을 때 앵글이나 편집으로 커버할 수 있어야지.

이성재 운동은 빨리 익히는 편인데 춤은 고역이더라. 고3 때 공부한 것 다음으로 열심히 한 게 이번이었다니까. 몸이 좀 됐으면 더 나았을 텐데. 기본이 워낙 없어서.

박정우 난 안 배워서 그렇지. 리듬은 좀 타는데. 이래봬도 중3 때 혼자 마이클 잭슨 스텝 독학해서 선보였다고. 반응? 폭발적이었지. 내가 춤을 배웠으면 배우들한테 더 부담스럽고 거북한 거 요구했을지 몰라. 다만 춤을 추면 행복해진다, 뭐 이런 영화인데 정작 연기하는 배우들은 힘들어하니까 내가 사기치고 있나 싶어서 미안하더라. 너나 (박)솔미는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아무래도 부담이 됐을 거라고. 시작이야 쉽지만 어느 경지에 오르기는 어려우니까.

이성재 풍식이처럼 첫 스텝 밟을 때야 ‘찌릿’ 하는 건 없었지. 그래도 느린 왈츠 같은 거는 느낌이 묘하더라고. 집에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스텝을 밟기도 했고. 왜 그 ‘나도 (필이) 온다’고 문자메시지도 보냈잖아. 요즘은 여기저기 춤 잘 춘다, 고 기사가 뜨는데 오히려 과대포장돼서 나중에 영화 보고 실망할까봐 걱정이라니까. 기대보다 잘하더라 뭐 이 정도면 딱 좋겠는데.

박정우 <쉘 위 댄스> 보면서 ‘저건 춤도 아니야’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이성재 춤 모르고 볼 때는 드라마나 정서에 빠져서 간 거지. 엊그제 DVD로 다시 봤는데 우리 초보 때 하던 자세들이 나오더라.

박정우 처음부터 그 영화는 무시하고 시나리오를 썼지만 사람들은 자꾸 한국판 <쉘 위 댄스>다, 뭐다 그렇게 비교할 거란 생각은 했지. 그래서 촬영 임박해서 배우들이 수준이 안 되면 촬영일정을 연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중간에 한번 갔을 때 <쉘 위 댄스> 광팬인 안무가 선생이 ‘훨씬 낫다’기에 욕은 안 먹겠다 싶어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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