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람의 전설> 감독·주연배우 수다난장 [2]
2004-03-26
사진 : 오계옥
정리 : 이영진
정리 : 오정연

# 4 감독 맞아? 배우 맞아?

“이왕 바깥 바람 쐰 김에 제작진에 얹혀지내면서 휴가나 보내자고 맘먹었습니다. 도시락 나오겠다 숙소 있겠다, 금상첨화지요. 그런데 얼마간 섞여 있다 보니 눈치가 보이더라구요. 뭣보다 감독과 배우 사이가 듣던 것과 너무 달라서 당황했습니다. 저도 영화에 대해서 좀 알거든요. 춤이라는 게 테크닉만 갖고선 안 되거든요.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시는 파트너를 배려하려면 박학다식해야 하죠. 그래서 말인데 영화는 감독 예술 아닙니까. 그런데 배우가 감독 무시하고 반기를 드는 일이 종종 있더라니깐요. 더 이상한 건 촬영이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감독과 배우가 사이좋게 차를 타고 가더란 말이죠.”

박정우 처음엔 날 감독이라고 생각도 안 했는지 무시 많이 했지.

이성재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영화 찍긴 나도 처음이라고. 대사 어미 하나 내 맘대로 했다고 화를 내놓고선. 대사 입에 들러붙게 쓰는 재능은 알겠는데, 자기가 무슨 박수현(김수현 작가를 빗대서)인 줄 알고 그러니. 이유를 말해줘야 배우가 납득하고 따르지.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데 누가 하나. 내가 애들도 아니고.

박정우 내가 만날 그랬냐. 특별히 어미를 신경써서 썼던 부분만 그랬지. 내 시나리오 보면 알잖아. 대사 중에 …도 있고 …도 있고. 호흡 길이까지 염두에 두면서 쓰는 건데. 그때는 분명히 말을 끝내고 나서 다음 문장을 시작해주길 바랐는데 니가 리허설 때 이어서 대사를 치니까 그렇지. 결국 니 맘대로 하라고 했잖아.

이성재 날 나쁜 사람 만들지 말고. 내가 그 다음부터선 어미 하나하나 다 물어봤잖아.

박정우 카바레에서 춤추는 장면도 그래. 내가 이렇게 하라 했더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랬잖아. 내가 오죽 민망하고 무안했겠냐. 그렇게 당하고 모니터 앞에 왔는데 스크립터가 피식 웃더라.

이성재 했던 말 또 와서 하려는 것 같기에 그냥 그런 건데, 뭘. 그걸 서운하게 생각하면 쓰나. 다음에 다시 작업하면 개인적인 친분을 현장에서 너무 드러내면 안 되겠더라. 다른 스탭들이 불편해지니까. 박 감독하고 첫 작품 무조건 하겠다고 약속했던 건 이렇게 편한 감독이랑 영화를 찍으면 촬영현장이 얼마나 즐거울까 뭐 그래서 한 건데 그게 너무 심하다 보니 경우에 따라 썰렁한 분위기가 되더라고. 그래도 박 감독 현장 통솔만큼은 중견감독 이상이었지.

박정우 조감독 때 나 성질 더러운 걸로 악명 높았거든. 작가할 때는 그럴 일이 없었고 나이도 들고 했으니까 성격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안 변했더라구. 세팅하는 시간에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더라구. 그러니까 막 소리를 지르면서 작업하게 되더라. 난 현장에서 머리 쥐어짜는 게 싫어. 그냥 이게 맞다고 우겨야 할 때가 있는 거지. 결과적으로 더 좋은 거를 찾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것도 맞는 거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헷갈리는 거거든. 필이 가는 대로 한 호흡으로 쫙 밀고 가는 게 편집실에서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 그게 니 입장에선 아무 생각없이 찍는 것처럼 보였을래나.

이성재 상업영화 감독이라고 하면 순발력이 꽤 중요하다고 보거든. 내가 처음으로 칭찬한 날 있잖아. 대전에서 라스트 장면 찍을 때.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카메라 두대로 40컷을 찍어야 하는데 스탭들은 다들 내일까지 찍겠거니 했다고. 근데 찍고 나니까 2시가 조금 넘은 거야. 빨리 찍는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별 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걸 보면 능력이 있긴 하지.

박정우 그 장면은 조감독이 ‘이건 불가능한 일정이다. 숙박 일정 연장하자’고 했던 건데 ‘일단 점심 먹을 때까지 찍어보자’고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찍고 나서 허전하고 불안하고 찜찜했으면 다시 찍었을 거야. 이번에 내가 촬영기한 어긴 적이 있나. 힘조절은 내가 좀 하지. 공들여 찍을 건 제대로 찍거든. 그런 내가 왜 이제 입봉을 했을까?

이성재 잘난 척하긴. 어떨 때는 스트레스 받는다니까. 차 타고 같이 가면서 ‘오늘은 너무 잘 찍었어’ 이럴 때는 대꾸도 하기 싫어.

박정우 전에 한번 겸손한 척했더니 사람들이 더 재수없다고 하던데. 어차피 첫 작품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순 없는 거라고 봐. 그렇다면 내가 썼던 시나리오만큼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없는지 정도만 확인하자는 거지. 그래야 다음 작품에서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거고.

이성재 이번이 마지막이면 어떡하나?

# 5 자기 스텝에 자기 발 걸린 사연

“춤을 한 3년 배우면 자기 스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를 조심해야죠. 응용동작이네 어쩌네 하다보면 스텝이 꼬여 멋대로 춤추게 마련이거든요. 이거 고치기 어렵습니다. 배우로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두 사람도 그런 적이 있지 않았을까요. 문득 그게 궁금해졌습니다. 게다가 정상에 오르는 데 정도(正道) 보다는 사술(邪術)의 유혹도 있을 테고, 물리치지 못해 된통 당하는 수도 적지 않거든요. 그때야 ‘진정 춤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뒤늦게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답니다. 저라고 별수 있었겠습니까. 꽃뱀한테 몇번 당하고 난 다음에야 철들었거든요. 그때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쪽팔려서.”

박정우 작가 처음 할 때 학교 후배들이 ‘형 거는 재미는 있는데 깊이가 없어요’ 그러더라. 그때 충격 먹었지. 겉으로는 가벼워도 속에서 건져낼 게 없는 것이 아닌데 그걸 몰라주나 싶어 섭섭했고. 표면적인 대사들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뻔한 기술자가 다 됐구나 싶더라. 코미디 장르가 말이 안 되는 상황들의 연속이잖아. 그러다보니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넘길 수 있는 기술들이 생겨서 몸에 뱄더라고. 나중엔 신인감독들한테 ‘걱정하지 마. 내가 넘겨줄게’ 그랬을 정도니까. 그런 잔기술 부리고 또 그게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져간 데는 내가 작가생활에 애착이 별로 없어서 무책임하게 반복한 것 아닌가 싶어. 내 것은 감독하면서 보여주겠다 뭐 이런 것이랄까. 돌아보면 치열한 작가 의식도 별로 없었던 거지. 1천만명 동원 작가니, 고료 1억원 작가니 하는 것도 별로 안 기뻤거든. 감독할 때 작가 경력이 도움되겠구나 싶었던 정도지.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인간관계나 돈 뭐 이런 것 때문에 끌려간 것 아닌가 싶고.

이성재 은근슬쩍 자신이 천만 작가인 걸 상기시키네. 난 아직도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상황이고 후배들 끌어줄 여유도 없고. 내 것 만들기도 솔직히 벅차거든. 상대배우 챙기는 것도 결국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고. 연기에 정상이 없으니까. 그래도 가끔 서운하더라. 지르고 터트려야만 연기라고 봐주잖아. 그걸 잘하면 인정해줘야지. 그런데 수위 조절하면서 극의 줄기를 끌고 가는 연기에 대한 평가는 박해. 사실 그게 더 머리 아픈 건데도 잘 모르는 거지.

박정우 그거 알지? 나 처음에 미쳤다고 욕 많이 먹은 거. 이번 작품 한다고 했을 때 위에서 스탭이나 배우를 짜줬잖아. 이왕 A급영화라는 모양새가 갖춰지면 입봉하는 나로선 좋지. 적당히 포장되면 난 묻어갈 수 있으니까. 근데 그게 어느 순간 너무 재미없는 게임 같은 거야. 촬영은 A급 기사가 해주고 미술은 또 누가 해주고. 난 현장에서 편하게 컷이나 나누고 그러면 되겠다 싶으면서도 만들어가는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성재 나한테 기자들이 만날 드라마 안 하세요, 하는 거랑 비슷하지. 금전적인 거 생각하면 눈 딱 감고 두달 찍자 그러면서도 안 돼. 순간적으로 그럴까 하다가도 마는 거지. 촬영할 때도 준비없이 갈 수도 있지만 성격상 쉽게 가질 못하니까. <빙우>까지는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안에 억지로 나를 뀌어맞추는 식이었는데 요번만큼은 좀 다르게 가자 싶었어. 이전 작업방식이 오히려 방해되는 것도 많았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캐릭터가 어떻다, 이런 규정 말고 내가 그냥 그 인물이려니 여겼지. 촬영 전에 대본 덜 보고 현장에서도 느낌대로 가려고 했고. 그러니까 첫 촬영 때 촬영시작한 지 3, 4주 지난 것 같더라고. 전엔 6, 7회차까지 항상 힘들어 했거든. 이젠 닫혀 있고 막힌 캐릭터를 연기하더라고 전보다 좀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 6 초심을 잊지 말자고요

“무도(舞蹈)가 예술이냐 아니냐는 어쩌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초심(初心)을 얼마나 되새기고 있느냐가 관건인 거죠. 돌이켜보니 흔들렸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던 저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가능햇던 데는 ‘첫 스텝을 밟는 순간 소음투성이 세상이 진공상태가 되고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던’ 순간이 떠올라서였을 것입니다. ‘삼고초려 끝에 스승에게 세숫물까지 떠받쳐가며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한 발자국씩 내딛었던’ 고통스런 순간이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해서였을 것입니다. 플로어에서 상대를 리드해가며 만끽할 수 있었던 저만의 세상을 향한 항해가 여전히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성재 처음에 방송사에 공채로 들어가긴 했지만 한달에 많이 나가면 5번, 평균 3번 정도만 나가니까 할 일이 없었지. 내가 단번에 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딱 눈감고 2년만 연수하자 그랬느데. 그래도 집에서 갓난애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왜 나를 선택 안 할까. 뭐가 부족한가. 쌍꺼풀 수술이라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박정우 너도 아픔이 있었지. 역할 맡은 거 다른 사람한테 뺏기고. 나는 일부러 약속을 만들었어. 바쁘게 살려고. 몇시에 누구 만나고, 몇시에 누구 만나고. 연출부 생활 때는 잠이 모자랐지. 일하고 밤에는 시나리오 쓰면서 몸을 학대했고. 그러다가 <키스할까요>부터는 시나리오만 계속 써서 들고 갔는데 문전박대 당할 때는 허송세월하는 것 아닌가 갑갑하더라. 충무로 처음 들어가서 첫 촬영 때 슬레이트 치잖아. 엄청 연습했는데 역시 실수했지.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가는 ‘삐’소리를 듣는 데 울컥하는 거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개봉 때 연출부 크레딧에 내이름 올라갈 때, <키스할까요>로 작가 박정우 크레딧 올라갈 때, <주유소 습격사건> 매진됐을 때도 그랬지.

이성재 이번에도 감독 박정우 하는 순간에 울컥하겠네. 예고편에 박정우 감독 작품, 이렇게 써줬으니 이미 울컥했을지도 모르겠고.

박정우 근데 내부에서 장사에 도움 안 된다고 본편에선 뺐어.

이성재 하긴 나도 늘 촬영현장 옆을 우연히 지나가기만 해도 찌릿해. 후배들한테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 말할 수 있어 행복하고.

박정우 내가 만든 캐릭터들이 뭐에 꽂혀서 주변 안 보고 미친 듯이 가는 거잖아. 설령 무모하다고 할지라도 말이지. 그런 사람들을 대접해주지 않는 사회가 싫지.

이성재 박 기사 이제 그만 하고 집에 갈 차나 좀 대절하지.

박정우 만날 니가 내 운짱 했는데 오늘은 내가 해야 하니 좀 어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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