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바람의 전설>의 이성재
2004-04-02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날렵한 제비라뇨? 품격있는 예술가겠죠!

배우는 만물상자같다. 뚝딱 한번 치면 살이 수십 ㎏ 늘어나고, 뚝딱 하면 운동 선수가 되고…. 이번엔 뚝딱 했더니 춤꾼이 하나 탄생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울랄라 시스터즈>처럼 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었지만 거기서 주연 배우들의 춤은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했다. 영화 속 설정이 아마추어여서 그래도 됐지만, 그 때문에 이 영화들을 ‘춤 영화’로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바람난 전설>은 ‘춤 영화’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 박풍식은 춤에 문외한이었다가 전설같은 춤꾼이 돼 날렵한 춤솜씨를 수시로 선보인다. <바람의 전설>이 드라마를 따지기 이전에 우선 춤을 보는 맛과 재미를 채워주는 영화가 된 건 박풍식 역의 이성재(34)의 공이다. 몸이 뻣뻣하기 그지 없던 이성재는 세달 동안 하루 종일 춤만 춘 결과, 대역 없이 100% 자기 춤으로 영화를 채웠다. 한국 영화의 소재와 장르를 넓히게 하는, 의미있는 정성이다.

석달간 하루 10시간씩 춤만 춰

“처음엔 대역을 쓸 걸로 생각했다. 몇 달 배울 순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프로 춤꾼이 될 것같지 않았다. 대학교 때 디스코장 가서 춤추다 거울 보면 내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때가 없었다. 그런데 박정우 감독이 대역 없이 내가 출 걸 요구했다. 그 요구도 요구지만, 춤 학원 원장이 첫날 추는 것 보고는 ‘정말 이 사람이 할 거냐’고 묻더라. 그때 오기랄까, ‘그래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이성재가 할 수 있는 건 ‘시간투자’밖에 없었다. 아침 9시에 학원가서 오후 6~7시까지 추고 집에 오고, 그 단순한 삶을 한창 더울 7월부터 세달간 살았다. 그 덕에 촬영에 들어갔을 땐 “춤 춘다기보다 연기한다는 마음으로” 춤을 출 수 있었다. 이성재의 춤은 군살 없이 검소해 보이는 그의 몸과 안무에 충실한 동작으로 인해 느끼함이 없다. 날렵하지만 섹시하다기보다 품격이 있어 보인다. 그게 자신을 ‘제비’ 아닌 ‘예술가’로 믿는 박풍식의 캐릭터에 어울린다.

풍식은 꼬집어 말하기 힘든 인물

<바람의 전설>에서 이성재는 이전과 조금 다른 태도로 연기에 임했다. “유일하게 캐릭터를 생각하지 않고 들어간 영화다. 박풍식 캐릭터를 뭐라고 말하기도 힘들고, 감독도 모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그냥 내가 하는 게 박풍식의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갔다. 나중에 영화보면 관객들이 인물에 어떤 느낌을 갖겠지 하며 열린 마음으로 했고, 그게 편했다.”

이전에 이성재가 맡은 역들은 그 자체가 개성이 강한 인물이라기보다 개성 강한 이들 사이에서 균형잡는, 이성재의 말로 “코미디 영화에서 나만 코미디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자유롭게 튀기 힘든, 상한과 하한이 정해진 역이었다. “<빙우>에서 내가 까부는 표정이 나오면 영화 분위기가 흐려질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여러모로 캐릭터를 생각하지만 겉으로 잘 나타나진 않는 연기가

“<공공의 적>처럼 목적이 분명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하는 역을 해보고 싶다. 그런데 영화를 내가 다 고르는 게 아니라 나한테 요청이 들어온 것 안에서 고르니까….”

다음엔 트럼펫 불어야 하는데…

차분하고 술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이성재는 촬영 없을 때 집에 죽치고 지내는 자신이 ‘참 재미없게 사는 것같다’고 전부터 말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춤이 새 취미가 됐을 법한데 “일로 배워서 그런지 나중엔 몰라도 별로 추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배운 춤 중에 빠른 라틴댄스가 아닌 느린 왈츠를 제일 좋아하는 것도 이성재답다.

다음 영화 <신석기시대>를 위해 지금 트럼펫을 배우고 있고 이게 새 취미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성실한 태도, 매니저 없이 혼자 다니는 모습 등 여러 면에서 안성기를 닮은 이성재의 안성기에 대한 언급. “데뷔 때부터 워낙 닮고 싶어했던 배우다. 안 선배의 연기도 좋아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배우의 느낌, 그걸 나도 갖고 싶다. 그게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온 데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꼭 안 선배를 따라 한다는 게 아니라, 나도 열심히 살다 보면 그걸 갖게 되지 않을까.”

스텝 밟고 전기 튀다, 그 남자

작은 대리점 관리사원으로 아무런 삶의 의미도 재미도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사는 풍식(이성재). 어느날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 만수(김수로)는 이른바 사교춤 강사로 풍식에게 춤을 배우라고 꼬신다. 한참을 거절하다 첫 스텝을 밟은 그의 몸엔 전기가 일어나고 그의 마음 속에는 광풍이 불어온다. 살아야 할 이유가 섬광처럼 그에게 떠오른 것이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박정우 감독의 연출 데뷔작 <바람의 전설>은 그의 시나리오 이력과는 다르게 자못 진지한 드라마다. 영화는 친구 만수의 사기로 대리점에서 쫓겨난 풍식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던 춤의 고수들을 찾아 춤을 연마하는 과정, 마땅히 춤출 곳이 없어 고민하다가 진출한 캬바레에서 뭇 여성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본의 아니게’ 제비가 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남들이 뭐라건 간에 풍식은 자신을 예술가라고 지칭한다. 주변 사람도 비웃고, 관객들도 웃는다. 그러나 풍식의 춤을 향한 열정은 정말 진지하다. 실은 ‘한 끝차이’라도 있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예술가’와 ‘제비’ 사이에서 풍식의 정체성은 강제로 균열당한다. 그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연출이 신선한 유머를 준다. 다만 대한민국 춤꾼 세계의 사실적인 디테일이 빈약하고, 그때문에 이들의 비애같은 것이 제대로 배어나오지 못하는 것같은 점은 아쉽다.

무엇보다 <바람의 전설>의 가장 큰 재미는 나도 한번 춤을 배워볼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춤장면들. 이성재, 박솔미를 비롯해 출연배우들의 훈련된 춤솜씨가 눈을 즐겁게 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