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사마리아>의 ‘윤리’가 가진 폭력성
2004-04-09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아비는 왜 딸에게 묻지 않는가?

<씨네21>은 지난 443호와 445호를 통해 페미니즘 비평을 둘러싼 강성률씨와 심영섭씨의 글을 실었다. 비판과 반론으로 이어진 이 논쟁을 소모적이라고 평가하는 황진미씨는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자”는 입장에서 <사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보내왔다. 그는 “이 글을 페미니즘으로도, 반페미니즘으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영화읽기 자체”라는 입장이다.편집자

황진미/ 영화평론가 chingmee@hanmail.net

<사마리아>는 흔히들 이야기하듯 ‘딸과 원조교제를 하는 놈들에 복수하고, 딸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통쾌한 복수극이자, 부녀간에 말없이 화해를 주고받는 가족드라마로 거칠게 읽었을 때나 가능한 독법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딸은 성매매가 아닌 몸보시를 하고 있었으며, 아비는 딸과는 일체의 교감도 없이 혼자서 심판과 기적(구원) 사이를 헤매다 사라지는 이야기다.

청소년 성매매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도그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녀들은 사소한 물욕으로 몸을 파는데, 그녀들은 판단이 미숙하므로 그녀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둘째, 그들은 변태적인 마초로서 오로지 젊은 몸을 탐하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응징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 영화는 위의 세 도그마 중 앞의 두 가지는 완전히 뒤집으면서, 세 번째 도그마는 아버지라는 전형적인 인물을 통해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불일치는 보편적 윤리판단이 얼마나 (남성)주체의 독선에 의거한 것이며, 기괴한 모순을 내포하는지를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내준다.

뒤집으면서 순응하는 도그마

바수밀다-재영은 알선, 흥정, 돈 관리 등 ‘매매’(賣買)에 해당되는 (흔히 포주의) 업무는 여진에게 맡기고, 남자들을 만나는 순수한 ‘춘’(春)만을 자신이 행한다. 그녀는 섹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도 하며, “잠깐 만나도 같이 사는 것”이라 느낀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들과 사귀고 있는 것이며, ‘매매’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사귀기 위한 매개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여진이 ‘매매’ 총책을 맡기 전부터 ‘춘’을 했지만(“괜히 널 끌어들여서…”), “너 없이는 난 아무것도 못해…”라고 말하듯 여진이 해주는 ‘매매’업무는 ‘춘’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업무이다. 즉 그녀가 하는 것은 ‘매매+춘’이 아니라 그야말로 연애를 하는 것이요, ‘시간제로도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다. 여진은 그런 재영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진은 그녀와 재영이 ‘매매+춘’의 업무분담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중 핵심적인 업무는 섹스라고 생각한다(“힘든 건 너야”, “그런 더러운 놈들에 대해 알아서 뭐할 건데?”).

그런데 재영이 죽는다. 흔히들 하는 말로 단속 경찰에 토끼몰이가 되어서 절박하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굳이 죽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비장하지 않게 (장난하듯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떨어져서 죽었다. 그녀는 경찰에 잡히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경찰의 심문을 받는 것’ 따위가 (피차에) 생뚱 맞은 일이기 때문에 (원조교제라 다그치는 경찰에게 ‘바수밀다’ 이야기를 하리?) 피하느라 뛰어내린 것이다. 그녀는 가족을 대라고 울부짖는 여진에게 ‘그 오빠’를 불러달라 한다.

‘그 오빠’를 불러오는 과정에서 여진은 두 가지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는 (그들은 설사 재영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재영은 진심으로 그들을 애인으로 만나고 있었으며, 자신은 친구의 행위를 완전히 몰이해하고 있었다는 각성, 둘째, “우정도 좋지만, 처음인데 괜찮냐?”고 묻는 말이 가소롭게 느껴질 만치 (처녀성을 버리고도, 죽어가는 친구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는 자책과 더불어) 흔히들 대단하게 생각하는 성 경험이라는 것이 누군가 죽고 사는 문제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운가, 하는 발상의 전환이 그것이다. 그 사건 이전에 여진의 생각은 일반적인 관념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그녀는 ‘아버지의 법’에 속해 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접해볼 필요도 없이 더러운 놈들이고, 성매매의 기억은 평생 갈지 모르는 두렵고 위험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친구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서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매매춘이 아니라 연애를 수행했던 재영의 취지를 복권시키고자 (환불을 통해) 금전교환을 원인무효시키고,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바수밀다-재영 역할극을 수행하려 한다(“제가 원래 재영이에요”, “재영이도 그렇게 좋았어요?”). 그녀는 “돈 돌려줄게요, 그럼 편해지죠?”(즉 ‘그러면 매매춘이 아니라 연애가 되는 거죠?’)라고 하더니, 웃는 자신에게 자존심 상해하는 남자를 꼭 껴안아주며, 우는 남자에게는 “누가 죽었어요? 제가 위로해 줄게요”라고 말한다. 그는 <파란 대문>의 그녀처럼 흉내내기를 통해 공감과 합일에 이른다. 즉 그녀는 바수밀다-재영-여진이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의 법에 속하는 자가 아니고, 바수밀다의 법(자비? 보시?)에 속하는 자가 된다. 따라서 그녀는 심판의 대상도 아니고, 용서의 대상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자기 몸을 보시의 수단으로 처분(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진짜 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불타는 적개심으로 그들에게 다가선다. 그들은 찍소리 못하고 맞고 있다. 그들은 뻔뻔하지도 못하다. 그들이 낯선 남자의 질문 한마디에 바르르 떠는 것은 청소년 성매매가 사회적으로 매장이 될 만큼 위중한 범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내면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소녀의 싱싱한 몸을 원하는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성인 여자와의 대등한 관계가 두려운 소심하고 미성숙하며, 섬약한 자들이다. 그들이 섹스보다 위로나 인정을 갈구하는 허약한 인격이라는 것을 묘파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 <버스, 정류장> <그 남자의 사정(事情)>에서 암시되었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 남자의 사정>을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문제삼았듯이) 사회의 규범적 인식과 불편한 충돌을 일으킨다. 단 이들이 ‘미친 아비’에 의해 무참히 응징되므로, 이들을 ‘어찌됐든 당하는 것이 마땅한 놈들’로 쉽사리 결론지으며 안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청소년 성매매에 대한 도그마 ‘소녀 피해자 vs 마초 가해자’를 심각하게 비틀고 있음을 인지한다면, 그것을 심판하고 응징하는 주체인 아버지의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비는 그놈들을 응징하고, 그녀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세 번째 도그마에 가장 충실한 자로서, 혼자서 보호와 응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법을 집행하는) ‘형사’이자, 어머니라는 매개 변수를 줄이기 위해 ‘홀아비’로 설정되어 있다. 아비는 처음 딸과 여관에 있었던 남자에게 뭘 했냐고 다그친다. “연애 좀 했다”는 대답에 “여자 나이가 몇살이었냐?”고 다시 묻는다. 즉 어린 딸은 연애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돈 몇푼에 홀렸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아비는 딸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자는 딸을 몰래 보며 흐느끼고, 등교길에 기적담을 들려주고, 하교길을 미행하며, 돌을 던져 방해하고, 남자들을 징벌하러 다니면서도 정작 딸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다. 왜? 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거나,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고,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으며, 딸에게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심판과 구원을 자임하는 아비

그의 병리적인 행동의 근간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개재되어 있다. 첫째 그는 딸의 행위를 매매춘으로 규정하고, 딸을 더러운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피해자로 간주한다. 둘째, 딸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자신도 그 더러운 놈들과 같은 세상의 아버지임에 자괴감을 느낀다. 셋째, 자신(만)이 딸과 그들의 행위를 심판할 수 있으며, 단죄나 사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딸에게 그녀(들)만의 법이 있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녀의 몸이 아버지와 무관하게 온전히 그녀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딸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 몸을 보시할 수 있는 주체라고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자들은 오로지 그녀를 탐하는 남자들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들만 벌하러 다닌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미쳐간다. 그는 무자비한 피의 심판을 행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적(구원)을 열망한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서 그녀는 ‘죄’를 행한 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한 것이므로, 심판받을 일도 없고 용서받을 일도 없다. 따라서 그 기적 이야기는 그녀에게 소용되지 않는다(“아빠는 기적을 믿어?” “기적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어”). 딸은 심판과 구원의 이분도식 위에 있지 않으며, 그러기에 큰 변화 속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갈수록 초췌해가는 것과 그녀의 주위에 아버지가 맴돌며 방해한다는 것 등을 인지할 즈음 결정적으로 (화장실에서 수갑을 보고) 아버지의 살인을 감지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망가지는 것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자신 역시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해명할 수 없음에 괴로워진다. 갑작스레 떠난 여행에서 삼키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우겨넣는 김밥 마냥 아비의 머릿속은 감당할 수 없는 판단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럼에도 끝까지 딸에게 “교황청에 공식 인정을 받은 테레사 성녀” 이야기를 하는 그 절대적 소통불능의 상태에서 딸은 자다말고 꺼이꺼이 운다. 딸은 아비가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말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대화일지 모른다(마치 거의 대부분의 김기덕 영화에서처럼). 그러나 이 영화의 딸과 아비는 끝까지 소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해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방기한다. 그나마 믿는 것은 딸이 아비보다 강해서 아비가 포기한 길을 의연하게 돌을 손수 치우고, 이제 혼자서 차를 몰고 갈 것이라 믿기에, 자신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살 것이라 믿기에, 딸을 자동차에 두고, 아비는 자신이 속해 있는 아버지의 법의 세계로 소환되어갈 것을 자청하여 떠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아비(동일자)는 왜 딸(타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가? 스스로 딸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니며, 죄인을 징벌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믿는 (남성)주체들의 보편적 윤리의 전제는 얼마나 독선적이며 배타적인가? 동일자가 타자에게 행하는 심판과 용서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자, 당신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전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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