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거짓말에 휩싸여 자신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비애, <라이어>
2004-04-20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아내가 둘이나 되는 행복한 남자, 그 이중생활이 들통날 위기에 처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데, 이 기나긴 하루는 도대체 어떻게 끝날 것인가

<라이어>는 레이 쿠니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 한국에서도 연극으로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던 <라이어>는 적절하게 바꾸어놓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원제는 다) 거짓말만으로 전체를 이끌어나간다. 사소한 사고와 그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한 한 남자의 삶, 그 삶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에 끌려든 몇몇 인물이 전부인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뼈대 위에 영화 한편을 올려놓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경형 감독은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성공작으로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얼버무리고 지나간 원작 인터넷 소설의 여백을 에너지로 채웠고, 그저 나열하기만 하는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흘러가는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김경형 감독은 또 한번 부딪힌, 집 한채를 뜯어고친다고 할 만한 어려운 각색을 어떻게 만들어왔을까. <라이어>는 구멍 하나없이 촘촘한 원작과 함께 그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도 흥미로운 영화다.

설정과 규모가 약간 바뀌었지만 영화는 대체로 원작과 비슷하다. 택시기사 만철(주진모)은 고향에서 만난 아내 명순(신영희)과 부유하고 아름다운 또 다른 아내 정애(송선미)와 살고 있다. 복잡한 시간표를 따라 두집을 오가는 그는 1년 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이중의 삶을 꾸려왔다. 그러나 우연히 지명수배범 신장원을 태운 어느 밤, 그 시간표에 치명적인 구멍이 뚫린다. 교통사고가 나서 스케줄이 흐트러진데다가 신장원이 체포되는 바람에 시민영웅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만철은 같은 집에 사는 친구 상구(공형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 공모는 연이은 장애물에 부딪힌다. 박 형사(손현주)와 김 기자(임현식)가 그를 따라붙고, 신문엔 얼굴이 실리고, 명순은 급히 정애의 집으로 달아난 만철을 찾아다닌다. 즐거워야 할 생일. 만철은 작가도 감탄할 만한 거짓말을 이어가면서 진정 사랑하는 두 여자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라이어>에 제대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이 여섯명과 정애집 위층에 사는 게이 알렉스가 전부다.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은 반나절 남짓. 노상강도와 싸우는 사건의 발단을 자동차가 뒤집히는 사고로 바꾸고 공간을 넓혔지만, 무대 위에서 긴장감 있게 치고받는 대사만으로 영화는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라이어>는 연극보다 속도를 늦추는 역행을 택했다. 만철과 공범 상구는 두 여자와 두 남자에게 쉴새없이 거짓말을 쏟아놓아야 한다. 정애에겐 시골길에서 차가 고장나 밤을 샜다고, 김 기자에겐 동명이인 정만철이 존재한다고, 박 형사에겐 남모를 비밀생활이 있었다고, 명순에겐 만철이 회사갔다고. 그 와중에 여섯명은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서로 만나고 그때마다 또 다른 거짓말이 뛰어나와서 이전 거짓말에 몸을 포갠다. 급박할 거라고 기대하기 쉽지만, <라이어>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길게 만철과 상구의 난감한 표정과 몸짓에 머문다. 김경형 감독은 <라이어>는 재미있는 코미디이면서 거짓말에 휩싸여 그 자신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비애도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런 비애는 몰아치기만 해선 느끼기 힘든 것이다. 발악에 가까운 거짓말은 코믹하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가엾게. 그 정서 사이에 조금은 높낮이가 어긋난 틈이 있어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진심은 항상 마음을 사는 법이다그 진심이 자연스럽게 배어나기 위해선 연기도 중요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김경형 감독은 “공형진에게서 느린 연기를 끌어내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거짓말을 해대는 이들은, 혹은 반나절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수없이 정체성을 바꾸는 남자를 눈앞에서 보는 이들은, 어떻게 감정을 수습할까. <라이어>의 배우들은 그 궁금한 질문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준다. 노련하거나 신선하거나 변신을 시도하는 이 배우들은 <라이어>가 재미있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지만, 그 재미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 자신을 과장하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함께 있어 책임을 나누고 서로 바라볼 때가 더 좋아 보인다.

흔치 않은 소재와 제약, 형식을 가진 <라이어>는 여러 면에서 자주 보긴 힘든 영화다. 이 영화에서 중혼이나 동성애는 배척하는 손짓에 밀려나지 않고 오해받고 있으므로 감싸야 할 이해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원작에 없는 에필로그를 덧붙인 김경형 감독은 감히 손대기 힘든 원작을 두고도 자신만의 정서를 덧붙이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싣고 싶었던 정서는 새로 생겨난 에필로그에서만 자기 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영화 전반에 희미하게나마 흔적을 남기는, 공감과 포용이 <라이어>에는 있다. 엄청난 흥행으로 시작한 신인감독의 두 번째 영화, 5년 동안 대학로를 평정해온 막강한 원작, 여섯 배우를 조율하는 섬세한 손길. 조그맣고 단단한 코미디영화인 <라이어>는 그 모습 뒤에 이처럼 엄청나게 무거운 그림자를 깔고 있지만, 그리고 그 그늘은 종종 <라이어> 위로 엄습해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자로만 남겨두는 데에는 성공한 듯하다.

:: 김경형 감독 인터뷰

원작에 내 색깔을 덧붙이고 싶었다

김경형 감독은 2003년 초 마흔셋의 나이에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라이어>는 그가 몇년 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작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끝낸 그는 도전이 주는 불안과 쉽지 않은 영화를 완성한 만족을 오가고 있었다.

<라이어>는 원작에 없는 에필로그가 있다. 에필로그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 형사는 뭐하고 있을까, 김 기자는 어떻게 됐을까.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머지 네명의 이야기만 넣은 거다. 원작에 내 색깔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에 명순과 정애가 만나고, 상구와 만철은 궁상맞게 함께 살고 있다. 두 여자가 같은 택시를 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 인생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여섯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마지막 부분은 120컷이 넘는다고 했다. 상당히 복잡한 촬영이었을 것 같다.

미니어처와 인형을 만들어서 미리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해도 현장에 가니까 다 바뀌더라. (웃음)

그 장면은 속도가 다소 떨어지는 느낌도 있다.

거기에선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이미 거짓말은 다 했고, 언제 진짜가 나올지만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철은 더이상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 박 형사나 김 기자는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만철과 상구를 만나 하루를 망치지 않나. 서로 다른 시선으로 만철을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반응을 담았다. 여섯명의 앙상블을 유지하려니까 너무 힘들었다. 이래서 밥먹고 살겠나 싶어 유학가고 싶다. (웃음)

영화 두편이 모두 코미디다. 다음 작품은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코미디는 가장 어려운 장르라서 나이 50이 넘어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영화는 만화가 원작인데 코미디는 아니고 차분한 드라마가 있는 작품이다. 1500컷 정도 되는 <라이어>에 비해 800컷 정도로 이루어지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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