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소리없이 출몰하는 건조한 심리적 공포, <강령>
2004-04-20
글 : 오정연
언제나 그렇듯 공포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도,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그들은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여지없이 부숴버린 그 비극을 작정하고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순간의 선택에서 비롯됐고, 그 선택은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사소한 욕망이 낳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진짜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어느 날 유괴범한테 쫓기던 소녀가 우연히 사토(야쿠쇼 고지)의 가방에 숨어들고, 유괴사건의 담당 형사는 단서를 찾기 위해 혼령을 불러내는 능력을 지닌 준코(후부키 준)에게 접근한다. 준코는 결국 소녀를 남편 사토의 가방 속에서 발견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망상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 순간부터 이들 부부가 보여주는 변화들은 영화의 전반부에 이미 암시된 것들이다. 준코는 자신만 볼 수 있는 원혼들로 인해 괴로워했지만, <식스 센스>의 소년과 달리 그들의 사정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떳떳하게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토는 아내의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내심 그녀가 너무 유명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이중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영화는 그처럼 인정받고 싶어하던 자신의 능력을 기만하면서까지 사건을 수습하려는 준코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홀로 소녀의 원혼을 마주하는 사토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강령>에는 공포영화의 대명사격인, 선행 사운드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 따위는 없다. 오직 건조한 심리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설명적인 신은 배제되고, 충격을 안겨줄 만한 결정적인 액션들은 생략되거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지며, 화면은 느슨하게 구성되어 그 자체로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어 있는 화면 한 구석에서는 마주하기 두려운 그것들이 나타나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리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공포를 조성한다. 영화에서 소녀의 원혼과 사토는 물리적으로 접촉하는데 사토가 소녀의 원혼을 몽둥이로 폭행할 때의 둔탁한 소리, 소녀가 사토의 가슴에 진흙 묻은 손자국을 내는 순간의 질척한 소리는 그 어떤 음악이나 음향보다도 소름끼치는 울림이 된다. 일상적인 사운드에서 출발한 그 내면적인 울림은, 공포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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