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극찬 받은 <킬 빌2>의 LA 시사기
2004-04-21
글 : 옥혜령 (LA 통신원)
타란티노,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다

세상 모든 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수도 있고, 때로는 용두사미가 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일어나 ‘빌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길고 긴 복수의 여정에 나섰던 전직 암살원(일명 브라이드, 우만 서먼)이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4월13일, 미국 개봉을 며칠 앞두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를 LA 할리우드의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만났다. 때맞춰 아크라이트 극장에서는 타란티노 회고전이 진행 중이었다. <킬 빌 Vol.1>의 DVD 발매와 겹쳐 이곳저곳에서 다시 타란티노의 얼굴을 볼 일도 많아졌다. 직접 선곡한 전편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히트하면서, 영화 못지않게 음악에 대한 취향도 인정받은 타란티노가 요즘 가장 인기있는 TV 가수 발굴쇼, <아메리칸 아이돌>의 심사위원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월16일, 타란티노가 가장 좋아한다는 아크라이트의 유명한 돔 극장에서는 <킬 빌 Vol.1>에 이어 <킬 빌2>가 자정을 기해 일반인들에게 첫선을 보인다. 엇갈린 평단의 논쟁 속에 복수의 첫걸음을 뗄 당시에 비하면, “탁월하게 재미있고 황홀하게 우아한 결말”이라는 <버라이어티>의 극찬은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잠깐. 전편의 폭력성과 키치적 감수성에 토를 달던 평단이 이구동성으로 “만족할 만한” 결론이라고 점잖게 만장일치를 내리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일단 선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강렬한 액션으로 기선을 잡은 전편에 비하면 2편은 겉보기엔 무척이나 점잖다. 음양의 이론까지 빗댄 <빌리지 보이스> 짐 호버먼의 말을 빌리자면, “전편은 살냄새 나는 ‘양’기가 느껴지고, 후편은 천상의 ‘음’기가 느껴지는” 격이다. ‘수다쟁이’ 타란티노가 돌아왔다고 할 만큼, 후편에서는 액션 못지않게 ‘설전’이 중심이어서일까. 복수극 자체보다는 이면에 감추어진, 실상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이야기나 인물들이 드러나서일까. 그러고보니 ‘검은 코브라/브라이드’의 이름이며 기타 많은 비밀들이 밝혀진다.

살냄새 나는 양기로부터 천상의 음기로 총여섯장으로 이루어진 후편은 전편의 기억을 되살리는 브라이드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흑백 화면 가득 40, 50년대 영화에서나 봄직한 리어 프로젝션으로 영사되는 배경 풍경은 우리가 ‘향수와 기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필름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어디론가 차를 몰며, 브라이드는 냉소적이고 센티멘털한 플래시백으로 친절히 복수의 시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후편은 리스트에 남은 세명, ‘방울뱀’ 버드, ‘캘리포니아산 뱀’ 엘 드라이버와 그리고 두목 빌에게 차례로 복수하는 사건의 진행과 더불어 이 모든 복수극의 뒷사연을 추적하는 플래시백이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는 구성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직전의 텍사스의 결혼식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악명 높은 ‘빌’을 소개받는다. 빌과 검은 코브라의 사연이 드러나는 첫 번째 장이다. 후편의 주인공은 빌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두드러지는 빌의 페르소나는 사실 빌 역을 연기한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의 페르소나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에 브루스 리가 불을 지핀 쿵후영화 바람이 불었을 때 대인기를 끌었던 유명한 시리즈의 주인공, <쿵후>의 주인공을 맡은 이가 바로 데이비드 캐러딘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캐러딘이라는 캐스팅이야말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열광해 마지않는 70년대 대중문화, ‘미국판’ 아시아 문화 수용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살아 있는 아이콘인 셈이다.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은 예외없이 데이비드 캐러딘의 스크린 복귀를 언급하고 있다. 타란티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포주’(pimp) 캐릭터와 쿵후 마스터의 아우라가 어우러진, 매력적으로 비열한 백인 악당 캐릭터는 올드영화 팬들의 향수를 자극할 만하다 그러나 애당초 <쿵후> 드라마 제작을 제안한 브루스 리가 ‘당연히’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사연이 ‘아시아 남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인 쿵후 영웅 캐러딘의 페르소나에 대한 타란티노와 평단의 애정은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불편하다.

짐 호버먼이 애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인 숭배의 경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타란티노의 장르 사랑은 후편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과 쇼브러더스 쿵후영화의 결합으로 드러난다. 브라이드의 오적 중 빌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 멤버인 방울뱀 ‘버드’는 황량한 사막에 둥지를 틀고, 브라이드를 기다리는 고독한 총잡이 역을 맡았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미스터 블론드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마이클 매디슨이 연기하는 버드의 최후는 브라이드의 짜릿한 복수를 기대한 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듯. 정작 전편에서처럼 몸으로 치고받는 복수극의 상대자는 엘 드라이버(대릴 한나)가 맡았다. 이 시점에서 브라이드의 복수극에서 드러난 패턴 하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버드나 빌 같은 남자 캐릭터들은 할말 다하며 우아하고 심플하게 죽어가는데, 여자 주인공들은 난장판의 몸싸움 끝에(흔히 ‘고양이 싸움’ (Catfight)이라고 한다) 처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걸까. 평론가들이 종종 지적하듯, 볼썽사납게 죽어가기에는 너무나 쿨한 남자 영웅들에게, 타란티노는 절대로 ‘무례한’ 대접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쿵후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러브스토리” 전편에서 브라이드에게 복수의 검을 쥐어준 하토리 한조가 있었다면, 후편에는 학권의 진수를 전수하는 소림사 쿵후의 아이콘, 파 메이(Pai Mei)가 있다. 쇼브러더스 소림사 시리즈의 전설, <소림사 36실>의 고든 류(Gordon Llu Lai-hui)가 몸소 브라이드의 ‘백발 도사’, 쿵후 스승으로 나온다. 소림사 시리즈에서 일종의 반골 악당 캐릭터인 ‘파 메이’는, 브라이드의 사부이기도 했던 빌이 또한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 중국에서 현지 촬영했다는 후편의 8장, “파 메이의 잔인한 수업”은 쇼브러더스 영화 스타일에 대한 타란티노의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올드스쿨 쿵후영화의 빛바랜 와이드스크린과 조악한 사운드 녹음, 과장된 대사들, 극단적인 줌인, 아웃의 촬영까지 70년대 초 쿵후영화의 정취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사당 앞에 높인 길고 긴 계단만 봐도 도제수업을 받으러온 브라이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후편의 백미는 빌과의 한판 승부일 것인데, 불꽃 튀기는 한판 액션극이 벌어지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타란티노는 심리전이 동원된 ‘설전’으로 후반부를 장식한다. 타란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미녀 킬러들을 거느린 ‘악마적인 보호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구사하는 빌의 능수능란함은 과연 블랙스플로이테이션판 포주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전편에 맛깔나는 대사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의식이라도 한 듯 후편에서는 ‘슈퍼맨’ 조크를 곁들인 말의 진수성찬을 준비해두었다. 전사로서의 검은 코브라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브라이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의외다.

타란티노는 전편에 죽은 ‘살모사’ 버니타의 딸과 젊은 시절의 빌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격 애니메이션을 준비 중이라는데, 후편에 끝없이 반복되는 엔딩 크레딧처럼 <킬 빌>을 끝내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는지.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잘하는 건 당연히 알지만,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는 타란티노의 연출의 변이 그에 걸맞은 끝맺음을 했는지는 관객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캐러던이 재치있게 정의했듯, “쿵후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러브스토리”로 끝나는 <킬 빌>에서 정작 복수에 성공하는 것은 터프한 여자 영웅, ‘검은 코브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장르와 시대와 국적을 막론한 잡식성 B급영화 취향을 참으로 순수(!)하리만치 옹호해낸 점에서 백인 남성 감독 타란티노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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