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타일러의 출세작 <스틸링 뷰티>는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되면서 <데미지2>로 둔갑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다는 걸 제외하면 두 영화는 아무 연관이 없지만, 리브 타일러의 이미지만으로 보자면, 아주 난데없는 작명은 아닌 셈이다. 흑발의 롤리타. 여인의 몸에 아이의 순수와 악마성을 품은 리브 타일러는 그런 부조화의 이미지를 한동안 벗지 못했다. 훤칠한 키에 볼륨있는 몸매로, 십대 때부터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어도, 그 표정과 목소리에선 교태가 아니라 어리광이 묻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 리브 타일러가 언제부턴가 ‘어른’으로 보이더란 말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 <반지의 제왕>의 요정 아르웬으로 보낸 3년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꼬마 호빗을 구하고 인간 남자와 무모한 사랑에 빠지는 리브 타일러의 아르웬은 ‘남자의 향기’ 물씬 나는 이 영화에 온화한 모성을 불어넣었다. 뽀사시한 화면과 에코 음향을 입고 천상의 아름다움을 뽐낸 리브 타일러는 비로소 귀엽고 섹시한 틴에이저 이미지에서 탈피했지만, 이번엔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돌아올 길이 요원해 보였다.
리브 타일러는 리스크가 큰 선택을 했다. 괴짜 감독 케빈 스미스가 처음으로 시도한 가족드라마 <저지 걸>에서 수더분한 ‘옆집 여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포르노가 독신남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비디오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이 딸린 홀아비에게 연정을 품게 되는 대학원생 마야가 그의 역할.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죠? 당신 집으로 가요. 지금.”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봐주는, ‘이상적인’ 여자친구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엘프어로 말하면서,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만, 이 작품은 그런 외적 장치가 전혀 없었다. 나의 진짜 모습과 목소리로 연기를 해야 했다. 벌거벗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히달고>를 봤는데, 비고 모르텐슨(<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은 아직도 왕이더라. 가엾은 비고….”
리브 타일러가 성숙해 보이는 또 다른 이유. 그는 얼마 전 뮤지션 로이스턴 랭든의 아내가 됐다. 가수(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의 딸로 태어나, 뮤직비디오 <크레이지>로 스타덤에 오르고, <엠파이어 레코드> <댓 씽 유 두> 같은 음악영화를 거쳐, 가수의 아내가 된 리브 타일러는 유난히 ‘음악’과의 인연이 깊다. 훗날 꼭 도전해보리라 벼르고 있는 장르 역시 뮤지컬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스틸링 뷰티>), 로버트 알트먼(<쿠키스 포춘>), 마이클 베이(<아마겟돈>), 피터 잭슨(<반지의 제왕>) 등 저명한 감독들을 따라 블록버스터와 인디영화를 숨가쁘게 오고 간 리브 타일러의 다음 행보는 ‘감독’ 스티브 부세미의 저예산영화 <외로운 짐>. “미리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많이 말하면,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그냥 모든 걸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하이틴 스타에서 배우로, 리브 타일러는 이제 그 힘든 고비 하나를 넘기고, 진짜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