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기는 준비, 애드리브는 신기(神氣), <라이어>의 배우 손현주
2004-04-22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손현주의 얼굴은 재미있다. 짙은 눈썹과 길게 옆으로 뻗어 ‘한’인상 하게 보이는 눈, 거기에 두꺼운 입술이 언밸런스하게 붙어서 징글징글한 웃음을 만든다. 퉁명스러운 뚝배기 같은 얼굴은 한없이 수더분해 보이기도 하고, 한없이 장난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언뜻 드러나는 표정의 이면에는 ‘앞집 남자’의 평범함을 살짝 벗어나는 진지한 기운이 도사린다. <라이어>에서 그는 가죽점퍼와 배꼽 위까지 끌어올려진 바지를 입고 ‘라이어’(거짓말쟁이)를 쫓는 ‘박 형사’를 연기했다. 이런. <앞집 여자>의 손현주를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히 낯설어야만 할 역할이었다. 그러나 소심하고 나약한 앞집 아저씨의 모습에서도,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무식하고 성깔있는 형사의 모습에서도, 배우 손현주는 자연스레 읽혀진다. KBS 분장실로 리허설을 마치고 황급히 들어오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본 것은 특유의 재간으로 가득 찬 작은형이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그의 얼굴에서 보게 된 것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천생 배우의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아마도 그 무게감은 “돈이 되지 않지만 연기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단막극을 선택”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본을 숙지”한다는 그의 책임감과 성실함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라이어> 촬영이 재미있었다고 들었다.

배우들이 모두 잘해주었으니까. 김경형 감독이 배우들의 앙상블을 중점적으로 지도했다. <라이어>는 동숭동에서 공연 중인 연극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잖나. 그래서 처음 대본 받았을 때 굉장히 걱정을 했었다. 연극과 영화는 메커니즘이 다른데 어떻게 카메라에 옮겨놓을 것인가가 궁금했다. 배우들의 앙상블 때문에 촬영 전에 리허설도 여러 번 했다.

그 많은 배우들과 연기호흡은 어떻게 해냈나.

만약에 이게 넓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무대는 변화가 많으니까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연기자가 잔뜩 나와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부분이 많으니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대본을 읽고나서 이 영화는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발을 빼려고 했다. 공형진이 다시 전화를 해와서 같이 하자고 설득을 했고, 김경형 감독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수락했다. 연기를 하면서도 이게 화면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재현될까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감독과 모여서 회의와 토론을 많이 했다. 많은 연습과 수십번의 리허설을 거쳐 영화는 완성되었다.

김경형 감독이 처음부터 박 형사 역으로 본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그랬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더라고.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웃음) 처음엔 정말 안 하려고 했었다. 하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고 답답해서. 다른 영화대본들과 달리 감이 빨리 오지 않았고 박 형사라는 인물도 연기하기 어려웠다.

박 형사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도식적일 수 있는 인물인데.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 형사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열심히 하면 덜떨어져 보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머리는 전혀 안 쓰고 집중적으로 한 사건만 매달리는 형사를 연기하니까 덜떨어진 사람처럼 나오더라.

캐릭터 분석을 굉장히 꼼꼼하게 하는 것 같다.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나는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고, 애드리브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사이사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에만 살짝 애드리브를 넣는다. 감독이 연출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 선을 넘지 않고, 영화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한다.

대사의 톤이 색다르다. 감기 걸린 환자의 힘들게 새어나오는 목소리 같은. 그렇게 설정한 것인가.

나는 어떠한 대본을 받더라도 미리 구체적으로 그런 것들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큰 그림만 먼저 그려둔다. 드라마든 영화든 큰 그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그리다보면 작은 애드리브나 설정은 나도 모르게 붙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신기(神氣)라 해야 하나. (웃음)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소심하고 현실적인 남편 역을 주로 하는 데 비해 영화에서는 빠른 감각이 필요한 코미디 연기를 주로한다.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이런 역할을 선택하나.

아니. 대본들은 모두 사무실에서 가지고 오더라. (웃음) 지금 찍고 있는 <투가이즈>의 카메오 역할도. 뭐 이 영화에서는 카메오를 석달 동안 끌려다니면서 하니까 카메오가 아닌 것 같지만. (웃음)

그래도 <라이어>의 형사는 지금까지 드라마들의 역할을 뒤집는 묘미가 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마초를 불러들인 듯한.

그렇게 봤다니 고맙다. (웃음)

<라이어>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을 거라는 게 화면으로 묻어나온다.

재미있었지. 2003년 12월29일 첫 촬영을 한 것 같은데 어느덧 촬영이 끝나버렸더라. 끝나면서도 ‘어, 벌써 끝났어?’라고 할 정도로 현장 분위기도 재미있었고. 김경형 감독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대단하다. 판단력이 빠르고 현명한 사람이고.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공형진은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내가 연극에서 주인공할 때 공형진은 창지기도 하고 그랬다. (웃음)

지금까지 작업한 여섯편의 영화 중 어떤 영화를 촬영할 때가 가장 즐거웠나.

<기막힌 사내들>은 드라마만 하다가 본격적인 영화를 처음으로 한 거였는데, 되게 지겹더라구. 장진에게는 미안한데. (웃음) 드라마는 속도가 빠른데 영화는 느리니까. 이제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보니까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피아노맨> 찍을 때는 영화의 조명이라는 것을 이해 못했다. ‘조명 뒤집을게요’라기에 ‘뒤집어2???????라고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는 ‘조명 하나 뒤집는데 왜 나한테 말을 하고 그러지?’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야간조명이다 보니까 조명 뒤집는 데 2시간이 걸리더라. 그래서 두 시간을 길에서 벌벌 떨고 기다렸다. 그 조명이 천천히 뒤집어지기 시작하는데, 아우. 그걸로 2시간을 보내더라구. ‘다시 뒤집을게요’라고 했을때는 정말 ‘야이 xxx들아!’라고 하고 싶었다 . (웃음)

그때 영화는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 건가.

그랬다. 드라마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분위기들을 보았다. 밥차가 오면 다같이 밥을 먹고, 여인숙에서 같이 숙식하고. 그런 영화만의 분위기들. 이래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장 스탭들과 석달 동안 함께 밥먹고 움직이고 술먹으니까 지금도 그 사람들이 그리워지더라. 말하자면 영화는 전체의 예술인 것 같다. 비록 배우가 스크린을 좌우하겠지만. 모든 스탭들이 하나의 빈틈없이 착착 돌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본다.

본격적으로 영화작업에 재미를 느낀 건 어떤 영화부터인가.

<킬러들의 수다>부터 재미를 느꼈다. <기막힌 사내들> 때는 드라마 2개 동시에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말했지만 전체적으로 큰 톱니가 돌아가는 모습 같은 현장이 정말 아름답다. 조명막내, 소품막내부터 감독까지. 그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재미와 관계없이 출연작 중 하나를 꼽는다면.

<라이어>는 개봉 전이고. <맹부삼천지교>도 아직 개봉 중이고. 그 이전 작품들 중에서는 뭐 정신없이 했지만 <기막힌 사내들>이 좋다. 장진 감독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감각이 너무 빠른데 그걸 조금만 늦춰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본인이 연기하기에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점은 뭔가.

완성도 면에서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오늘밤 방송될 분량을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찍어서 겨우 내보내고 있다. 영화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젊은 친구들이 그래서 영화로 많이 가는 것 아닌가. 좀더 배우에게 편하고, 얼마든지 감독과 대화를 하면서 모니터를 할 수도 있고. 특히나 신인들에게 드라마는 그야말로 순발력과 대사 암기력과의 승부다. 빨리 해야 30∼40신을 하루에 찍는데. ‘지금 대본 줄게 얼른 외워, 다 외웠지? 빨리 촬영 들어가자!’라는 식이니까. 물론 영화도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이른바 ‘떠’야만 인정을 받으니까.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대형영화들도 좋지만 저예산의 조그마한 영화들도 빛을 봐야 하지 않겠나.

촬영준비가 대단히 철저하다고 들었다.

그렇다. 사실. 내 성격 자체가 그렇다. 드라마를 많이 해왔으니까. 대본이 숙지가 안 되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 일단 극의 흐름과, 작가의 대본은 완벽하게 숙지를 해가지고 간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본에 찍힌 점 하나도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는 사람들이 내가 연기를 편하게만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오오. 완벽주의자인가.

완벽주의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 후배들도 많고, 이젠 나이도 40이 넘어가는 중견인데 현장에 나가서 못하면 창피하니까 그렇지. 후배들이 많으면 그런 부담이 있다. 주위의 선배들을 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관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성공했던 예가 없다. 91년에 월화드라마 <형>으로 데뷔했는데. 만약에 내가 트렌디드라마로 시작했다면 지금까지 계속 연기자로 남을 수 있었을까? 그때 내가 연기를 배웠던 사람으로는 주현, 오지명, 김영철 선배 등이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슬렁슬렁 연기하는 줄 알았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키워가는 데 단막극이 참 좋다고 본다. 일주일에 촬영이 모두 끝나게 되는데, 단막극을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방송이 급박해도 충분히 PD랑 이야기할 수 있고.

배우로서 한 단계 성큼 나아가는 계기가 된 작품은.

그런 부분들은 다 단막극에서 채워진다. 단막극을 하면 연속극의 매너리즘에서 빠져나와 내 마음을 다시 가다듬게 된다. 단막극은 어떻게든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많이 할수록 도움이 된다. 틀림없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방송 단막극들 많이 하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는. 단막극을 많이 하면 연기하는 마음 자체가 달라지고 앞으로 가야 할 연기의 길이 보인다.

단막극은 촬영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영화작업과도 비슷하다.

그런 마음으로 한다. 한편의 영화를 찍는다는 마음으로.

요즘은 드라마도 주연이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영화도 주연 욕심이 생길 것 같은데.

주연 조연 그런 것은 신경 안 쓴다. 내가 나오면 다 주연인 거다. (웃음) 뭐, 욕심나는 것들은 있다.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씨.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그런 배우들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같은 배우들. 공형진도 그렇고. 공형진 자기 이야기 안 하면 삐칠걸. (웃음) 이범수도 좋은 배우다. 정말 모두 좋은 배우들이다. 최민식씨가 했던 <올드보이> 같은 역할은 정말 나도 해보고 싶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것이고, 그런 역할로 그것을 담아보고 싶다.

언급한 배우들도 그렇고, 본인도 극단 미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지 않았나.

극단에 있었을 때의 마음가짐이나, 다른 동료들과 같이 어울렸던 그런 기억들이 마치 엊그제 일 같다. 연극은 마음의 고향처럼 탄탄한 장소다. 알 수 없는 연극의 기(氣)? 그런 것들이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중심이 잘 흔들리지 않는다. 배역이 어떻든 내가 만들게 나름이니까.

중앙대 대학원은 현재 휴학 중이라고 들었다.

복학을 하려고 했는데, 등록금이 너무 많이 올랐더라. (웃음) 가을에 복학할 생각이다. 야간이니까 촬영 없을 때는 학교를 갈 수 있고. 그래서 바쁜 스케줄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는다. 사실 중양대 대학원을 가게 된 이유는 연기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된 내 자신이 점점 안일하게 무뎌져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니까.

노출신이 있는 영화는 안 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데. (웃음) 아내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예술한다고 가정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집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구태여 하고 싶지는 않다. 노출신이라…. (웃음) 내가 하면 흉하잖아. 내가 하면 바로 유호프로덕션이 되는 건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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