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류승완표 장풍 받아랏!
2004-04-23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현대의 도시에 도인이 살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떠오르는 건 ‘사주, 궁합, 관상’ 따위의 간판일 것이다. 또는 한때 행인의 발길을 막던 악몽의 “도를 아십니까”족에게 당했던 괴롭힘 정도 그만큼 도인과 도시는 섞이지 않는 단어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의 신작 <아라한-장풍대작전>은 “어쩌면 당신의 옆집에서 지금 도인이 형광등을 갈아끼우기 위해 공중부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물론 “정말”이라고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는 없다. <아라한>은 도시와 도인이라는 상극의 이미지를 하나의 그릇 안에 버무려놓는 발랄한 액션영화다.

정의감은 넘치지만 둔한 몸 때문에 허구헌 날 망신만 당하는 경찰 상완(류승범)은 어느날 ‘도인’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야매’ 침술사에, 700 전화서비스로 운세 상담 ‘알바’를 하는 이들을 믿지 않던 상완은 “마루치(득도한 남자)로 키워주겠다”는 말해 혹해서, 실은 그 집에서 사는 ‘아라치’ 소녀 의진(윤소이)의 미모에 반해서 팔자에 없던 수행의 길로 들어간다.

‘도시무협’이라는 변종장르를 표방하는 <아라한>은 도시와 무협이라는 단어조합처럼 충돌하는 상황과 이미지가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간다. ‘실내에서 장풍금지’라고 적어놓은 ‘칠선’들의 집안풍경이나 상완이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상해 “야 이놈아, 너 학교 어디 나왔어” 욱하는 도인의 성질, 산 대신 고층빌딩 옥상에서 하늘의 기를 마시는 수련 따위가 순수혈통의 무협영화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성룡과 주성치의 캐릭터를 버무려놓은 듯한 상완에게도 주변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무능력자와 액션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충돌한다. 악당 흑운(정두홍)과 유일하게 일합을 겨룰 수 있는 기를 가지고 있는 상완은 경공(몸을 가볍게 해서 빨리 움직이는 기술) 연습을 한다며 달걀 한판을 묵사발로 만들었다가 엄마한테 두드려맞는 액션영웅이다.

또한 영화는 첨단의 문명만이 자기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비밀의 도인들이 활보하는 무림으로 그려낸다. 고층빌딩 벽에 붙어 창을 닦는 인부나, 머리에 커다란 접시를 4층으로 이고 가는 식당 아줌마, 두손에 수십켤레의 구두를 가볍게 들고 가는 구두닦이가 어쩌면 모두 도인일 수도 있다고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보여주는 <아라한>에서 도인은 실은 장인이다. 대도시가 좋아하는 첨단의 기술은 아니지만 자기 분야에서 남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룬 이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영화는 보여주고자 한다.

충무로의 어떤 영화들보다 많은 와이어가 활용됐을 법한 액션은 <아라한>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둔 부분이다. 감독의 전작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액션이 등장인물의 감정에 대한 극단적 표현이었다면, <아라한>의 액션은 마치 <소림축구>에서 주성치 일행이 벌이는 축구무술처럼 아크로바틱을 보는 듯한 움직임 그 자체에 방점을 둔다. 마치 사각의 링을 비추듯 카메라는 뒤로 빠져나와 등장인물들의 싸움을 권투경기처럼 중계한다. 그 움직임은 마치 발레 동작처럼 경쾌하고 날렵하다. 액션영화 팬이라면 <저수지의 개들>에서 <협녀>, <황비홍>, <매트릭스>까지 감독이 따라하거나 변주한 액션장면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할 듯. 4월30일 개봉.

류승완 감독 인터뷰-'평범한 비범'은 장인의 모습

<아라한-장풍대작전>은 데뷔 때부터 장철 감독을 비롯해 주성치에 이르기까지 홍콩 액션영화광임을 자임했던 류승완(31)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다. 류 감독은 영화 안에서도 자신의 취향과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어렸을 적 <취권>을 보고 바로 도장에 등록했다는 감독은 이 영화가 많은 관객들을 도장으로 달려가게 했으면 좋겠단다.

액션 스타일이 <피도 눈물도 없이> 때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액션이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움직임 자체가 주는 쾌감을 스스로 즐기고 싶었다. 그런 만큼 액션에 리듬감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뒀다. 카메라도 전작에서는 인물에 바짝 붙어 관객이 싸움 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했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관객석에서 구경하는 경기처럼 뒤로 빠졌다.

액션과 코미디 외에 영화 내적으로 담고 싶은 게 있었다면

디테일을 보면 칠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평소 우리가 만나는 소시민과 다를 게 없다. 다만 이들은 드러나지 않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신념이나 기술이 21세기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들의 삶에는 진심이 있다. 그들의 진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소심한 액션영웅, 밥벌이 걱정하는 도인 등 평범한 비범을 내세운 이유는

사전 취재로 동서양의 신화나 무협지를 읽다보니 동서양 영웅의 큰 차이가 보이더라. 서양의 영웅은 신의 자식이거나 극적인 변신을 하는 인물이다. 할리우드 영화만 봐도 <헐크>나 <스파이더 맨>등이 모두 그런 이종인간들이다. 그러나 동양의 영웅은 평범한 인물이 수행을 통해 고수의 경지에 오른다. 평범한 인물이 한 분야의 고수가 되기 위해 매진하는 모습이 바로 동양적 의미의 영웅이 아닐까 싶다.

배우 류승범을 평가한다면

언젠가 내가 ‘스폰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승범이는 나보다 더 심하다. 그리고 훈련되지 않은 생짜의 힘 같은 게 있어 그의 연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 같은 걸 준다. <아라한->에서 친구에게 전화하는 장면을 ‘전화를 받는다’ 정도로만 설정했는데, 그 짧은 통화에서 상완의 전사를 파악하게 해주는 애드립을 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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