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스피드광 좀비들과의 아비규환, <새벽의 저주>
2004-05-12
글 : 김도훈
조지 로메로 영화에 스피드광 좀비들을 투여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시대의 관객을 위한 새로운 <시체들의 새벽> 리메이크

지옥이 만원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온다. 간호원 안나(사라 폴리)가 어느 날 새벽 잠을 깼을 때, 세상은 그녀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옆집 소녀에게 물어뜯긴 남편은 다시 살아나 안나를 공격하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친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이었다. 죽은 이들은 살아나 산 자를 먹고, 먹힌 자는 다시 살아나 산 자들을 공격한다. 우연히 만난 일행과 안나가 생존을 위한 성채로 선택한 장소는 교외의 쇼핑몰. 언제 그들에게 함락될지 모르는 성채에서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살아남는 것. 익숙한 기시감. 이 지옥은 이미 한번 우리를 찾아온 적이 있지 않던가. 공포영화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이 기시감은 알아차리기 쉬운 종류의 것이다. 과연 <새벽의 저주>의 원제는 ‘Dawn of the Dead’이며 여기서 이 영화가 공포영화의 대가 조지 로메로의 1979년작 <시체들의 새벽>의 리메이크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시체들을 20여년 만에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뱀파이어나 늑대인간과는 달리 좀비라고 불리는 살아 있는 시체들은 근사하게 재창조해낼 만큼의 매력이 있는 존재들은 아니다. 스타일리시한 가죽옷을 입혀서 총을 쏘게 만들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썩어 문드러진 모습으로 떼를 지어 걸어다니는 시체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이니 인격을 심는 일도 용이하지가 않다(조지 로메로는 <시체들의 낮>에서 이를 메리 셸리식으로 시도한 적이 있다). 아마도 좀비들이 지난해와 올해 갑작스럽게 주류 영화계에 쏟아져나오게 된 배경과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 근원은 대니 보일 감독의 저예산 공포영화 <28일후…>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28일후…>의 좀비들은 천천히 걸어다니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며 희생자들을 쫓았다. 이 ‘좀비가 달린다’는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지하에서 썩어가던 시체들을 다시 지상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다니는(사실 이 영화 속의 좀비들은 오히려 보통의 인간들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좀비들은 분명히 이 영화에 그만큼의 다채로운 액션을 가져다주었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단체로 산 자들을 습격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생존자들이 벌이는 게임의 긴박함은 관객을 쉽고 빠르게 가슴 졸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스피드광 좀비들에게서 부족한 점은 ‘살아 있는 시체’라는 존재 자체의 혐오스러운 눅눅함이다. 게다가 특유의 극적장치도 사라졌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들이 관객에게 극도의 서스펜스를 부여했던 순간은, 생존자들이 빠져나가기 곤란한 상황에서 좀비들이 아주 서서히, 조용히, 조급함 없이 그들을 압박해가던 장면이었다. 도피할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희생자를 향해 다가오는 이 축축한 존재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 그것이 불러오는 서스펜스는 관객을 심리적으로 쥐어짜는 좀비영화 특유의 공포장치들이었다. 존 카펜터의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같은 장치를 제대로 이용하면 그 가슴 졸이는 서스펜스는 배가되어 관객을 후려친다. 그 특별한 뉘앙스가 제거된 채 액션의 규모와 속도만 엄청나게 거대해진 <새벽의 저주>를 보는 것은 마치 랩터들로 가득한 <쥬라기 공원>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리메이크’라는 이름을 <새벽의 저주>에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일이다. 영화는 리메이크라기 보다는 로메로의 79년 오리지널 작품으로부터 그 모티브만을 가져와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낸 영화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시체들의 새벽>과 가장 다른 점은, 표면적으로는 좀비들의 속도감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진정한 ‘적’ 개념의 차이다. 79년작에서 좀비(사실 영화 속에서 ‘좀비’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현명하게도)라는 존재들은 인간의 적이 아니라 문명의 그늘에 희생당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일종의 메타포이며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극중의 인간들이 두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미워하고 짓이기려 기를 쓰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새벽의 저주>는 인간과 좀비를 아군과 적 개념으로 확실히 구분하며 선을 그었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경비대장 캐릭터에서 오리지널 영화의 주제의식을 살려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곧 좀비라는 공공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선한 인간들 편으로 너무 손쉽게 귀속되어버린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가 호러장르의 탈을 뒤집어쓴 채 ‘인간 야수성’을 관조한 작가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그 무게감을 벗어버리고 단순한 플롯과 빠른 액션의 여름영화라는 자기 위치에 조용히 머무른다. 쇼핑몰이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작에서 좀비들이 쇼핑몰로 모여드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숭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기억이 죽어서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메로의 좀비들은 자본주의의 성지에서 배회하는 측은한 소비자들의 망령이다. <새벽의 저주>도 잠깐 경찰 캐릭터 케네스의 입을 빌려 그 이유를 “예전의 기억이 남아서일 수도 있지, 혹은 우리 때문일 수도 있고”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발언에서는 ‘우리’로 상정되는 생존자들을 목적으로 모여드는 ‘적’으로 좀비들이 다시 한번 강조될 따름이다.

앞서 강조했지만, 이 영화는 조지 로메로의 79년작 <시체들의 새벽>에 대한 리메이크가 아니다. 감독 잭 스나이더가 “나는 그 영화를 리메이크할 생각은 없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던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조지 로메로가 ‘살아 있는 시체’라는 존재들을 통해 추악한 인간 사이의 생존투쟁을 묘사했던 비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어서 쉽게 흉내내거나 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한 톰 사비니(<새벽의 저주>에 잠시 카메오 등장한다)의 90년 작품이 실패했던 이유도 그 완성된 비전까지 되살리려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새벽의 저주>는 그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오리지널의 무게감에 맞서기보다는 완벽하게 새로운 노선에 승차하는 것을 택했다. 더 빠르고 더 크게,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법칙 아래 달려가는 영화는 그 한계 속에서 나름대로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낸다. 특히나 오프닝 타이틀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옥의 아비규환으로 변모한 밀워키의 모습을 과감하게 관객에게 던져버리는 오프닝은 그 직접적인 충격의 효과나 규모에서 기념비적이다. 총포상 앤디처럼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들도 제 기능을 다한다. 메스꺼운 신체절단의 고어와 본격적인 B급영화의 냄새도 이만한 규모의 영화로서는 이례적이다. 저예산 공포영화 집단 ‘트로마’의 일원으로서 <트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하기도 했던 제임스 건에게 각본을 맡긴 효과를 본 셈이다. 이렇듯이, 원작의 무게에 질식해서 몸부림치기보다는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된 <새벽의 저주>는 소리를 질러대며 즐길 만한 공포영화로서는 충분히 겸손한 성공을 거두었다.

:: 배우 사라 폴리

차가운 금발 퀸, 뜨거운 여전사 되다

<새벽의 저주>에서 사라 폴리라는 여배우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낯선 일이다. 이 젊은 여배우는 우리에게는 캐나다 출신의 작가 아톰 에고이얀의 차갑고 냉소적인 두 작품 <엑조티카>와 <스위트 히어애프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장 앳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는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으로 그녀는 바론 뮌하우젠 남작과 버디를 이루어 온갖 모험에 뛰어드는 샐리 역을 맡았었다. 고국인 캐나다의 TV시리즈 <에본리로 가는 길>로 일약 아역스타로 떠오른 그녀는 그저 그런 소비적인 영화들에 출연하기보다는 자기 개성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이나 캐나다의 작은 인디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커리어를 지속시켜나갔다. 아톰 에고이얀의 작품들에서 비극적이고 차가운 에고를 발산했던 것도 젊은 배우로서는 과감한 작업이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엑시스텐즈>와 경쾌한 아이디어로 가득 찬 타란티노식 영화 <고>, 캐스린 비글로의 <웨이트 오브 워터>, 스페인 출신의 여성 감독 이자벨 코이젯의 <나 없는 삶> 등으로 계속해서 관객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라 폴리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생활에 있어 확고한 신념을 가진 배우로 알려져 있다. 유니세프 지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하고 사회주의 활동을 위해 고등학교를 그만두기도 했으며 직접적인 거리유세에 나서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새벽의 저주>는 그녀 커리어 중 이례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녀가 맡은 안나 역이 자기 신념이 확고한 여성 전사 캐릭터라는 점에서는 완벽하게 수긍할 만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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