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사이코드라마 속의 페미니즘, <인 더 컷>
2004-05-12
글 : 심영섭 (평론가)

여성주의적 ‘컷’들의 오디세이 <인 더 컷>

슬라보예 지젝의 책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는 히치콕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안다>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눈길을 끈다. 아들이 납치된 뒤, 도리스 데이가 부르는 <케세라 세라>를 지젝은 아들이라는 주체를 어머니라는 사물과 연결시키는, 어머니라는 초자아가 아들을 사로잡는 근친상간적 탯줄과 같은 연계라고 해석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커서, 리셉션 룸의 사람들은 그러한 외설적 과시에 당황하고 노래 내용처럼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돼라’는 어머니의 악의적 무관심이 바로 초자아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지젝은 재미있게도, 어머니의 목소리에 의해 지배되는 아들, 케세라 세라에 대한 대답이 히치콕의 다음 영화 <싸이코>에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아들은 어머니와의 탯줄적 연계를 끊지 못하고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마다 여자를 살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스 데이가 불렀던 저 상냥한 노래, <케세라 세라>가 어머니와 아들이 아닌 피해자인 딸과 어머니 사이에서 불릴 때 그것은 무엇을 담지하는가? 불길한 자장가처럼, 낡은 계단의 통로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 들리는 삐걱임처럼 영화 <인 더 컷>의 케세라 세라는 주인공 프래니의 무의식을 파고들며, 영화의 처음과 시작을 장식한다. 무엇이든 되고 싶은 대로 돼라. 그것은 차라리 초자아의 방임적인 악의라기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 같은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목소리만 남은, 케세라 케사라는 <인 더 컷>의 벌린 상처 속에 똬리를 틀며 메아리친다. 그것은 내가 그러했듯 너도 그러하라고 권유하는 목소리, 온통 존재론적인 합일을 이루고 싶은 이드의 미로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래서 <나는 비밀을 안다>의 아들은 천장과 통하는 다락방에 유배되어 있지만, <인 더 컷>의 딸들은 깊숙한 지하의 미로에서 마침내 자신의 욕망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섬뜩한 ‘거세’ 이미지들의 콜라주

도심의 낙서가 커다란 문신처럼 보이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정원에서 프래니의 여동생 폴린은 흩날리는 꽃송이의 세례를 받는다. 프래니의 현재몽인 이 꿈속의 꽃송이는 너무나 강렬해서, 심지어 프래니가 꿈에서 깬 뒤에도 그 촉감을 느낄 정도이다. 다시 잠든 프래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나 구혼을 했다는 낭만적인 동화의 한 토막 속으로 연이어 빠져든다. 이윽고 프래니의 현재몽 속의 꽃송이는 다시 과거몽 속에서는 흩날리는 눈송이로 연결되어진다. 그 눈을 맞이하며 프래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들의 연애를 축복 속에 시작한다. 아마 그 눈송이는 장차 프래니가 등대에서 살인범을 만나 기괴한 구혼을 받는 동안, 흩뿌리는 빗방울과 연관되어질 것이다. <인 더 컷>은 이런 식이다. 연상은 끊임없이 현실에서 미끄러지며 이완되고, 꽃-눈-비라는 흩날리는 사물들은 프래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칵테일해낸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했지만, 제인 캠피온 역시 2000년대 현재를 살아가는 독신 여성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무의식의 흐름을 뉴욕 지하철 통로에서, 후미진 뒷골목의 바에서 문득문득 잡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탄생과 환희의 기쁨이자 새색시 같은 행복의 길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섬뜩한 거세의 공포를 장식하는 불길한 징조이기도 하다. 여성의 절단된 사지보다도 더 무서운, 이 정의내릴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들의 콜라주가 <인 더 컷>의 공포의 실체이다. 행복했던 스케이트장에서의 구혼, 프래니의 아버지는 알고보니 시시때때로 여자들을 버리는 무책임한 바람둥이였고, 이 상처로 프래니의 어머니는 죽어버리고 만다. 푸른 수염의 회유와 가면은 여전히 프래니 안에서 살아 숨쉬고, 그녀 역시 어머니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인가? <인 더 컷>은 그러한 면에서 피로 갈겨쓴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외상이자 여성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거세의 이미지에 관한 영화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물리적 모양새로 컷, 꽃들의 언어와 침묵하는 사물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성기 그 자체이며,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물리적으로 <인 더 컷>. 그야말로 영화의 한컷한컷 속에 마음의 지형도를 담아두는 제인 캠피온이 시도하는 일종의 ‘컷들의 오디세이’이기도 하다.

일종의 불가능한 질환:어머니-되기

<인 더 컷>의 멕 라이언은 속어를 말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브로콜리가 음모 혹은 마리화나의 의미라면서, 속어는 성적이면서 폭력적인 데가 있다고 말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멕 라이언이 ‘말하는 여자’라는 설정은 그녀가 아버지의 법을 체화하는 주체 혹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으로 한다면 남근을 가진 어머니 즉 ‘코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동시에 <인 더 컷>의 언어는 차이가 아닌 차별로서, 그 속에 숨겨진 권력의지를 함께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프래니 앞에서 형사들은 여성을 병아리(chicks)로 동성애자를 몽둥이(fagot) 같은 속어로 지칭한다. 그들은 여성성을 비하하고 단어에서조차 그 어감을 거세시킴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리하여 9·11 테러 이후 폐허의 음산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뉴욕의 공기 아래에서 프래니의 ‘어머니-되기’란 욕망은 일종의 불가능한 질환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막상 도둑 고양이에게는 우유를 주지만, 신생아를 안고 층계 계단을 올라오는 가족에게는 눈길 한번 줄 수가 없다. 그녀는 모성에 관한 한 일종의 억압과 심한 왜곡을 경험하지만 스스로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많은 평자들이 <인 더 컷>을 여성의 욕망과 처벌로써의 죽음이라는 고전적인 할리우드영화들, 즉 <클루트>부터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와 같은 영화와 연관시키지만, <인 더 컷>의 프래니에게 있는 욕망은 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어머니의 육체성과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희구한다. 모성과의 합일에 대한 욕구는 그녀에게 끊임없는 결핍감을 제공하고, 의사 지망생이자 스토커인 조니가 자신의 애완견을 돌봐달라고 요청했을 때, 드디어 어머니-되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프래니는 매몰찬 거절로 그녀의 불안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녀의 무의식에서 나온 또 다른 분신 같은 폴린, 프래니가 이복동생이자 친구라고 부르는 폴린은 그녀의 욕망을 알아차린 듯 유모차와 조그만 아이가 달린 팔찌를 선물하며 그녀를 달랜다(그러나 프래니는 유모차는커녕 늘 떠날 사람처럼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닐 뿐이다). 프래니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온통 붉은색 꽃으로 치장한 속에 ‘엄마’라고 써 있는 거대한 하트 모양의 화환과 부딪힌다. 그녀는 아이를 꿈꾸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말 그대로 현실을 침범하는 욕망과 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어미니와의 합일과 그 이탈이라는 과제 사이에서, 기호계와 상징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널을 뛴다. 이것이야말로 제인 캠피온식의 모성의 시학이 아니던가?

‘구혼’의 반여성주의를 컷하다

그러나 <인 더 컷>은 <아리조나 유괴사건> 같은 코언 영화가 아니라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의 영화인 것이다. 캠피온 영화에서 여성들은 욕망을 하는 순간 위험에 빠져든다. 그들은 흔히 미친년으로, 괴상한 여자로 오해받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침묵했었다. 게다가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상흔은 두고두고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멍들게 만든다. 그것은 가부장제하의 폭압성이 여성의 육체에 각인되는 의식, 일종의 캠피온식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깨부수는 고발의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피아노>의 아다는 손가락을 잃었고, <여인의 초상>의 이자벨은 차거운 겨울날 빈 껍데기 같은 집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당연히 <인 더 컷>에서 프래니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폴린은 욕망하는 여자의 법칙에 맞게, 사지절단당한 채 피범벅이 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이렇듯 <인 더 컷>은 제인 캠피온의 어떤 영화보다도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구혼’이라는 제도 속에 깃든 허위성, 그 반여성주의적 태도를 날이 선 방식으로 갈라내버린다. 만난 지 30분 만에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렸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동화는 어머니의 다리를 아버지의 스케이트날이 싹둑 잘라내는 저 극단의 이미지로 완벽한 음화로 뒤바뀐다(캠피온은 종종 불길한 여성의 앞날을 흑백영화 같은 판타지 장면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여인의 초상> 때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낭만화되는 성적 실천이 바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의 핵심임을,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가부장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다는 페미니스트 캐서린 매퀴논의 구호과 동일한 이미지로서의 주장이기도 하다.

잔혹한 유머의 힘을 빌은 전복

유부남 의사를 짝사랑한 폴린은 소망한다. ‘나도 한번 결혼해봤으면.’ 그녀의 소망은 가장 사디스틱한 방식의 구혼으로, 사지를 절단당하는 즉석 결혼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의 흐름은 양심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야.’ 프래니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아이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에서>를 가지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자,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선 늙은 여자가 죽어요.’ ‘그럼 얼마나 많은 여자가 죽어야 멋있게 보이지?’ 그러자 아이들은 다시 대답한다. ‘적어도 셋이요.’ 이 계산법에 의하면 물론 네 번째 희생자인 프래니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셈이다. <인 더 컷>은 복선과 암시가 난마처럼 뒤얽혀서 때론 예언처럼 주인공들의 운명을 희롱한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에러인 동시에 제인 캠피온의 모호함이 주는 음습한 내음이 함께 풍기는 잔혹한 유머의 장치이기도 하다. 제자인 코넬리우스 웹의 이름을 거명하며, webb이란 이름이 두개의 b요 아니요?, 즉 to be or not to be냐고 물어보는 형사 말로이의 질문은 그대로 프래니의 앞날이 ‘삶이냐 죽음이냐’를 암시하는 운명의 노크소리가 된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의 정색한 표정보다는 <홀리 스모크> 이후 성차 뒤바꾸기(gender switch) 같은 장난스러운 장치를 통해 잔혹한 유머의 힘을 어떤 여유로 뒤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홀리 스모크>에서 인도의 정신철학을 굳게 믿게 된 루스(케이트 윈슬럿)는 그녀를 교화하러 온 PJ 에게 하이힐을 신기고 여장과 화장을 모두 한 뒤, 그 앞에서 오줌을 줄줄 쌌었다. 비슷한 처지는 <인 더 컷>에서도 반복된다. 프래니와 사랑을 나눈 형사 말로이는 결국 수갑을 찬 채 애완 동물처럼 침대 기둥에 묶여 있다. 그는 묶여 있으니 자신이 정말 계집애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정작 살인범을 향해 총을 쏘아댄 프래니는 흠뻑 피의 세례를 받고 그의 곁에 눕는데도 말이다. 폴린이 죽은 뒤 프래니는 한번도 입지 않았던 진홍의 옷을 입고, 마침내 욕망의 해방구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그런 프래니를 말로이는 “너무나 아름다워, 널 쳐다보면 더이상 형사 노릇을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점에서 <인 더 컷>은 심지어 <양들의 침묵>의 페미니스트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들은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프래니에게는 한니발 박사도 필요없다. 영화의 마지막, 구원자/피해자의 등식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은 저 이상한 아말감 상태의 프래니를 보라. 그녀는 스릴러 장르의 교란자이며, 동시에 자기 확정적인 여성으로 변모한다. 그녀가 바로 이웃집 소녀 같은 매력과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었던 멕 라이언이다. 그녀의 스타 아이콘은 <인 더 컷>에서 오히려 전복적인 이미지로 무기처럼 관객에게 겨누어진다. 네티즌들은 ‘멕이 왜’라며 통탄해하지만, 누군가는 웃을 수밖에 없는 장난스러운 전복 말이다.

심리적 표준 거리의 위반

이제 <인 더 컷>의 컷은 마지막 한개의 수수께끼만을 남겨둔다. 대체 서두에서 말한 제인 캠피온식의 ‘컷들의 오디세이’는 무엇이냐 하는 것. <인 더 컷>의 컷 속의 주인공들이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 대개 그들의 머리는 프레임 밖으로 일부 잘려져나간 상태이다. 항상 스크린 안으로 주인공들의 머리가 들어오는 표준적인 장면을 보는 관객에게, 이러한 화면짜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느낌을 줄 게 뻔하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의 선, 표준 선의 위반인 것이다. 캠피온의 카메라는 보통 감독들이 정해놓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심리적 거리보다 조금 가까이서 주인공들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놓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의식 세계에 대한 침범이라는 캠피온의 주제가 형식에 가장 잘 녹아들어가는 일종의 모험적 시도이기도 하다. 디온 비비의 카메라가 인물을 롱숏이나 풀숏으로 잡을 때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배경이 인물을 감쌀 때, 뉴욕의 문화지정학적 위치를 드러낼 때뿐이다. 그곳에서 뉴욕은 팔뚝에 거대한 문신을 새긴 도시처럼 기괴한 낙서투성이의 전위적인 장소가 된다. 아울러 캠피온은 흔들리는 핸드헬드와 얕은 심도 구성으로 종종 주변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며 프래니의 주변의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점을 절묘하게 집어내 보인다. 그것은 모호한 캐릭터와 모호한 결론에 걸맞은 모호함을 인물 주변에 흩어놓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 더 컷>은 사람들이 의식적인 생활에서 영위하는 짧은 지각의 순간을 순간순간의 초점 이동으로 함께 따라붙는다.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결코 딥포커스처럼 모든 것이 한번에 꿰뚫어 지각되어질 수 있는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요, 이러한 면에서 캠피온의 영화 실험은 ‘컷 안에서’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스릴러가 아닌 사이코드라마

<인 더 컷>은 개봉 당시 미국 평단의 많은 비평과 원성을 샀었다(<인 더 컷>의 IMDB 평점은 5.0에 불과하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로서는 예외적으로 <인 더 컷>은 별다른 수상이나 영화제 초청을 받지 못했다. 짐 호버먼은 예의 뚱한 표정으로 <인 더 컷>에 대해 “살인마를 복원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복원하려는 제인 캠피온의 시도보다 더 웃긴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호통을 친다. 그는 <인 더 컷>이 ‘아트 하우스 스릴러’로서 지나치게 잔혹하고 피투성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말대로 <인 더 컷>은 어쩌면 실패한 스릴러인지도 모르겠다. 멕 라이언 대신 샤론 스톤이 다리를 꼬고 한 무더기의 음모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해야 마땅한. 그러나 <필름 코멘트>의 에미 토빈의 말대로 <인 더 컷>은 스릴러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운 영화이다. 비록 살인마를 복원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복원하려는 제인 캠피온의 시도가 매우 웃길지라도, 여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게 가끔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는 허위 진술과 괴물들 사이의 줄다리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인 더 컷>의 공포가 그저 한 바가지의 피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인 더 컷>이 더 나아가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번 제인 캠피온 영화에서 멋진 라틴어풍의 이름 코넬리우스라는 제왕적 이름을 가진 흑인 제자와 한바탕 질펀한 섹스를 하는 멕 라이언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늘 호주, 인도, 뉴욕 등에서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하는 그녀가 이번엔 또 어떤 장소에서 여성의 욕망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이왕 잘못된 남자를 골라 컷당할 운명에 처할 바에야 아주 다른 무지하게 다른 타자를 껴안는 우리 시대의 코라를 영접하기를. 뚱뚱한 여자, 문신한 남자, 고집스런 여자, 여장한 남자, 흑인, 백인이 뒤섞인 제인 캠피온식 아말감이야말로 허접스런 지구 위의 경계를 허무는 내 책상 위의 천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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