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홍상수도 나쁜 남자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05-12
글 : 김경욱 (영화평론가)

페미니즘의 비평적 딜레마를 응시하기

“글로리아.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젊은 여성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어?”

“네 자신을 믿어라!”(Trust yourself!)

“겨우 그 한마디?”

“응, 그 안에 모든 비밀이 들어 있지.”

진부한 질문 한마디. ‘왜 당신이 하면 로맨스이고 내가 하면 불륜이야?’ 김기덕은 똑같은 말을 농담으로 되풀이했다. “이창동이 만들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고 내가 만들면 다 ‘지가 하고 다니는 짓’인가.”(<씨네21> 441호) ‘페미니즘 비평 방법론을 쇄신하라’(<씨네21> 443호)는 글에서 강성률은 김기덕의 의문을 반복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다른 감독의 영화는 김기덕처럼 혹독하게 비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리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은 어떠했는가? 만약 필자가 페미니즘 평론가라면 임권택의 <취화선>을 혹평했을 것이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도 혹평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에 대한 반론 ‘페미니즘 비평이 몸부림칠 때’(<씨네21> 445호)에서, 심영섭은 강성률의 지적을 인용해가며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는데, 홍상수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인용에서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강성률이 지적한 부분을 전부 나열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다른 부분에 대한 반박을 통해 홍상수의 대목까지 충분히 설명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씨네21>에 실린 심영섭의 20자평과 별점을 참고해보자. <나쁜 남자> “김기덕 감독, 자궁에서 도 닦는 버릇은 여전하구려” ★☆, <생활의 발견> “춘천 찍고, 경주 찍고, 허허실실 윤리학으로 턴턴” ★★★★). 나는 여기서 사라진 홍상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심영섭의 반론에 언급되지 않은 홍상수 영화에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페미니즘 비평에서 사라진 홍상수

김기덕의 영화를 둘러싸고 회자되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은 “김기덕 영화를 남자평론가는 지지하고, 여자평론가는 싫어한다”라는 단언이다. 심지어 김기덕 감독조차 “여자평론가들은 내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여자평론가는 여자가 아니거나 평론가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 이 단언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싫어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단순 무식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 환원이며, 총체적 모순을 전체적 대립으로 후퇴해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해도 하나의 단언으로 나타날 때 그 뒤에는 어떤 법의 명령이 도사리게 된다. 따라서 김기덕 영화에 대한 단언은 은연중에 ‘김기덕을 지지하는 남자평론가는 마초이고, 김기덕을 좋아하는 여자평론가는 문제가 있거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기의를 내포하게 된다. 또는 여자평론가가 남자평론가를 침묵시키고 싶을 때, 남자평론가가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며 예외적 자기규정을 내세울 때, 편리한 방편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싸워야 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환원이며 단순화가 아닐까?

아무튼 여자평론가인 내게는 싫거나 좋지 않거나 좋아하는 김기덕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이건 홍상수 영화에도 마찬가지이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당시 한국영화 상황에서는 경이로웠고, 그뒤의 영화들은 매번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지만 ‘열혈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한마디로 여성에 대해 어떤 성찰도 없는, 한 남성의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이런 영화가 존재하고 소통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에 대한 위협이고 어떤 이유에서건 이 영화를 지지하는 행위는 여성들에 대한 모욕일 뿐”(강성률의 글에서 재인용)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던 김기덕의 <나쁜 남자>만큼 마음을 흔들었던 홍상수의 영화는 아직 없다. 그래서 기회가 닿았을 때 나는 그 영화에 대해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이젠 그만 제자리로 보내주세요, 혹은 육신과 영혼의 도착증”). 정과리의 지적처럼 비록 신파조가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망가진 삶의 밑바닥을 고통스럽게 드러내는 그 처연하고 막막한 느낌은 매우 기괴한 방식으로 보는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면 홍상수 영화는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생활을 발견하게 만드는 순간은 있어도 그런 감정의 동요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김기덕의 영화는 그렇게 싫고 미운데 홍상수 영화는 별다른 문제없이 참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서 덧붙이자면, 나는 <오아시스>에서 홍종두가 한공주를 강간하려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공주가 종두에게 전화를 거는 대목에서 결정적으로 그 영화가 매우 불편해졌다. 또한 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그들 다수가 극찬하고 감동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김기덕의 영화보다 훨씬 위험한 영화로 보인다). 이제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 기대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홍상수 영화에 문제를 제기해보려고 한다.

김기덕의 선화 vs 홍상수의 선화

자, 여기 두명의 선화가 있다. 하나는 <나쁜 남자>의 선화이고, 또 하나는 홍상수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이다. 흥미롭게도 두 여자 사이에는 이름말고도 공통점이 더 있는데,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미대를 다니다가 남자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채 신세를 망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남자>의 선화(두 여자의 구분이 필요한 경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는 박선화로 쓰기로 한다)는 애인의 손에 이끌려 모텔 앞까지 갔다가 완강하게 거절하며 도망치는 여자다. <오! 수정>의 수정처럼, 결혼이라는 계약행위에서 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려고 처녀성을 놓고 게임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화는 자신의 의사를 능동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낸다. 사창가 깡패 한기의 덫에 걸려 강제적으로 창녀가 되는 과정에서도 선화는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완강하게 저항한다. 반면, 박선화는 고등학교 선배의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 강간을 당한다. 그녀는 애인 헌준에게 ‘아는 선배와 같이 밥을 먹었는데 좀 맛이 없었다’는 말을 할 때처럼 태연한 어투로 그 사실을 알려준다. 헌준은 선화를 여관으로 데려가 ‘강간당한 그곳’을 자신의 손으로 세심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나서 섹스를 한다.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 그럼 깨끗하게 되는 거지”라는 남자의 말에 “나 깨끗하고 싶어, 깨끗하게 해줘”라고 여자는 화답한다(섹스로 인해 더렵혀진 몸을 섹스로 깨끗하게 하려는 선화의 행위는 마약복용 혐의로 땅에 떨어진 이미지를 누드영상집으로 만회하려 했던 배우 성현아의 현실 속 모습과 기이한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이 홍상수의 전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깨끗하고 싶다’는 대사에는 이중의 울림이 있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헌준은 선화를 버리고 유학을 떠난다. 선화가 ‘더렵혀진 여자’라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없었거나, 사실은 강간이 아니라 화간을 한 ‘헤픈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선화를 회상하는 두 번째 남자 문호 역시 섹스하고 나서 그녀를 떠나간다. 지저분한 여관방에 앉기조차 꺼려하므로 결벽증이 의심되는 그는 털이 많은 선화의 다리를 본 다음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애인은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위가 더러워서, 감추어진 애인은 겉으로 보이는 부위가 더러워서 각각 떠나간다. 반면에 한기는 선화와 함께 있고 싶어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까지 저지르면서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온다. 그는 결코 선화를 떠나거나 버리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선화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강제적으로 창녀가 된 선화와 자발적으로 술집 여자가 된 선화에게는 두 가지 종류 혹은 세명의 ‘나쁜 남자들’이 있는 것이다.

박선화를 버렸던 헌준과 문호는 그로부터 7년 뒤, 선화를 찾아온다. 술집을 한다고 무조건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는 것은 편견이지만, (홍상수와) 헌준은 그렇게 생각한다. 문호가 선화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때, 헌준이 놀라면서 다소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천에서 옷가게 주인이 되었다고 했으면 그렇게 당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선화가 술집이 아니라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면, 두 남자가 눈오는 날 낮술을 마신 상태에서 ‘간다’, ‘못 간다’ 승강이를 하며 찾아갔을까? 아니면 술집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선화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원망도 없이 선화는 다시 두 남자를 차례로 받아들이고, 홍상수의 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과거는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비록 헌준이 선화 앞에 무릎을 꿇고 담뱃불로 자해를 시도하며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선화를 비난하며 가차없이 떠나가는 것이다. 문호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선화는 더러운 여자이자 헤픈 여자라는 확증을 잡았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일말의 죄책감까지 말끔히 털어내면서 길바닥에 여자를 두고 가버린다. “너무 쉬운 거 아냐”라고 소리치는 선화의 대사처럼, 버리는 그의 행위는 역겨울 정도로 너무 쉽다.

멋진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문호 또한 선화와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비싼 집을 과시하고,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학교에서 강의한다고 자랑하고, 다시는 자기 아내와 포옹하지 말라고 느닷없이 소리지르는 문호를 보면, 헌준에 대한 어떤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헌준의 애인 선화를 차지함으로써, 자신도 그만큼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선화씨, 사실 오늘 헌준이 형보다 내가 더 오고 싶었어요”라고 하면서도, 선화의 소식을 알고 있었던 그는 혼자서는 결코 선화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 헌준이 선화를 만나겠다고 하자 자신이 헌준 이상의 남자로 남아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려는 강박증에 막연한 기대가 더해져서 따라나서게 된 것뿐이다. 따라서 헌준이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 선화와 문호가 남는 것이 아니라, 선화를 이미 기억하지 않는 문호만 남게 된다. 결국 두 남자는 선화에 대한 죄책감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 또는 다시 시작해보려는 희망에서가 아니라 같은 여자를 두번 버리려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자기의 공간으로 데려와서 섹스하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버린 다음 7년 만에 찾아와 섹스하고 다시 버리는 남자, 어느 쪽이 더 잔인한 것일까?

여성에 대한 ‘생략’을 반복하는 홍상수

하지만 반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비슷한 형태로 변주된다. “남자는 다 똑같애. 다 개새끼들이야. 당신도, 그 사람도…”라고 말하는 선화의 대사처럼, 중국집 여종업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수작을 거는 걸 보면 헌준이나 문호나 그놈이 그놈이지만, 문호는 어쩌면 헌준보다 좀더 비열한 인간인 것 같다. 문호는 우연히 제자들을 만나고 술자리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하다가 한 학생으로부터 무례하게도 “당신, 저질 아냐”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헌준에 대한 열등감을 선화와의 섹스로 만회했듯이, 이번에는 제자가 안겨준 마음의 상처를 제자 경희와의 섹스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화와의 관계는 은밀하게 즐길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만 문제의 학생에게 들키고 만다. 문호는 선화에게 그랬듯이 어린 제자의 앞날을 염려하기는커녕 자기 걱정만 한다. 선화와 똑같이 오럴을 해주었던(그래서 선화처럼 살게 될 수도 있는) 경희는 선화처럼 버려지고, 문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런 반복은 위험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홍상수의 반복이 갖는 잔인함이 있다. 반복의 긍정적 가능성은 성공적인 재현을 통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해보려는 시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반복은 거기에 반성적 성찰이라는 매개를 괄호쳐 넣음으로써 차이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복할 때, 거기에 수많은 작은 차이들이 개입해서 결국은 동일하거나 더 나쁜 반복으로 이끌고 그 반복의 시도는 결국 허무한 몸짓으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지옥의 영겁회귀에 다름 아니다.

김기덕은 주로 남자의 악행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져가는 여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여자) 관객의 분노를 자아낸다. 홍상수 영화의 경우, 여자들은 매번 남자들의 성적 욕망과 이기심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소비된다. 여자가 완강하게 거절할 때 폭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섹스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하고 싶어하거나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임신이 의심되어 섹스하기 어려울 때(<강원도의 힘>), 오빠가 해달라고 요구할 때(<오! 수정>), 여관방이 지저분해서 누울 엄두가 안 날 때(<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럴 때 여자들은 손이나 입으로 해준다. 그들은 남자주인공과의 섹스에 만족해하고, ‘너무 좋다’거나 ‘잘한다’고 하면서, 남자들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켜준다(김기덕의 남자들이 자기혐오에 시달린다면, 홍상수의 남자들은 나르시시스트들이다). 홍상수의 여자들이 더욱 이상한 점은, 남자들은 비록 속물적인 욕심이라고 해도 무엇이 되려고 동분서주하는 데 비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주인공 남자가 원하는 그 자리에 도착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스크린에서 그들의 고통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여자) 관객의 분노가 끼어들 틈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의 응답에 조건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여자는 항상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자, 조건이 더 좋은 남자쪽을 선택한다. 그렇지 못한 남자는 무시당하거나 버림받는다. 선영은 남편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자마자 경수를 버리고(<생활의 발견>), 수정은 무능력한 PD에게 끌리면서도 부잣집 남자 재훈과 섹스한다(<오! 수정>). 그러므로 유부녀는 능력있는 남편에 힘입어 미혼녀보다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어 있고, 바람 피우는 남자에게 착한 아내와 아빠 말을 잘 듣는 자식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욕망에 대한, 김기덕과 홍상수의 오해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용서가 안 되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도마 위에도 오르지 않는 것일까? 홍상수와 김기덕의 관심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그들은 섹스에 관심이 많거나, 섹스를 중심에 놓으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홍상수는 그 중심의 주변을 불투명한 그물망으로 만든다. 그것이 불투명한 까닭은 시간의 구조를 통해 앞문으로 나간 욕망이 뒷문으로 다시 들어오는 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상을 밀어내도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욕망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김기덕은 주변을 중심으로 만들고, 투명하게 만들려고 동분서주한다. 투명성을 향한 김기덕의 노력은 자꾸만 장면에 모든 것을 펼쳐놓고 보여주려고 한다. 홍상수가 욕망의 질문에 대한 환상의 대답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김기덕은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 페미니즘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는 도덕적으로 자기를 방어하지만 윤리적 차원에서는 자아의 자포자기가 있다. 그러나 김기덕은 도덕적으로 자포자기하지만 윤리적 차원에서는 자아를 종교적인 속죄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전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 속에 남자,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제목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발견해내고, 후자는 ‘나쁘다’는 윤리적 판단이 들어 있는 제목 <나쁜 남자>를 생각해낸다.

결국 홍상수든 김기덕이든, 그들 영화 속의 남성인물들은 고통의 자리를 껴안거나 게임의 형식을 가져와서, 여자를 즐긴다. 그들 영화가 주는 지옥 같은 경험은 그 즐거운 향락에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그것이 향락이 아니라 여자라는 대상이 주는 욕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결국 여성은 일종의 ‘팜므파탈’이다. 한기로 하여금 선화를 사창가로 끌고 가는 죄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도 선화의 (경멸을 빙자한) 유혹 때문이며, 헌준과 문호를 눈오는 날 부천까지 기어이 이끌어내는 것도 시간의 그물망을 빌린 박선화의 유혹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운명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팜므파탈에게 이끌린다. 그들은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그 잘못의 원인은 대상으로서의 그 여자 선화(들)에게로 돌려진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선택에 대해 반성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욕망에 대한 오해는 결국 그들 자신의 함정에 빠져 향락이라는 자멸에 이를 거라는 것을.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자멸하기 전에 김기덕이든 홍상수든(혹은 이창동이든)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휴머니즘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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